간략한 서양 의학사 (2)

흑사병이라는 이름은 환자들이 피하 출혈로 피부가 검게 되는 것에서 유래합니다. 페스트의 원인균은 Yersinia pestis인데, 이 세균에 감염된 쥐벼룩이 쥐에 붙어서 이동한 뒤 인간을 물어서 세균을 옮깁니다. 페스트는 감염 부분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선(腺) 페스트: 림프절 감염으로, 림프절이 붓고 고열, 구토, 두통이 이어지며 증상이 진행되면서 검은 반점이 나타납니다. 심해지면 폐 페스트, 패혈성 페스트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쥐벼룩이 사람에게 옮기며, 사람간 전파는 흔치 않습니다.
2) 폐 페스트 : 폐 감염으로, 폐 부종이 나타납니다. 공기를 통해 사람간 전파가 가능하며, 각혈 등도 나타납니다.
3) 패혈성 페스트: 가장 심각한 형태로 혈액 감염, 즉 전신이 감염됩니다. 괴저 증상이 나타납니다.

페스트 원인균 Yersinia pestis

14세기 구대륙을 강타한 흑사병은, 여러 가설들이 있지만 중앙아시아 스텝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또한 비단길과 몽골 제국이 페스트의 전파와 매우 관련이 깊습니다. 몽골 제국은 비단길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동부 유럽을 원정하였는데, 1347년에는 크림 반도의 카파 (현재의 우크라이나 크림공화국의 페오도시야) 에 대한 포위 공격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킵차크 한국의 자니베크 칸은 페스트로 죽은 군인의 시체를 투석기에 담아 도시 성벽 너머로 던졌고 (생물학 무기!), 결국 도시에 페스트가 퍼졌습니다. 그런데 카파에는 제노바의 교역소가 주재하고 있었는데, 교역소 사람들 일부가 시칠리아를 비롯한 남부 유럽으로 배를 타고 오면서 전 유럽으로 페스트가 퍼지게 됩니다.

14세기 흑사병 전파 경로

한편 흑사병이 유럽에 퍼지게 된 것에는 여러 요소들이 작용했습니다. 우선 교역량의 증가로 사람들이 접촉할 기회가 많았고, 또한 교역선을 따라 페스트균에 감염된 쥐벼룩을 가진 쥐들이 들어와 페스트를 옮겼습니다. 또한 14세기 초 유럽에서는 중세 온난기가 끝나고 소빙하기가 오게 되는데, 그 결과로 곡물 수확량이 줄고 사람들의 영양상태도 나빠져 질병에 더 취약하게 됩니다. 특히 삼포제를 하기 힘들었던 북유럽에서는 흑사병으로 인한 피해가 더 컸습니다. 그리고 위생 체계의 부재도 흑사병이 퍼진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선페스트를 옮기는 쥐벼룩 (Xenopsylla cheopis)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1/3 가량을 죽여버렸습니다. 대규모의 인구 손실은 노동력의 손실로 이어졌으며, 이는 유럽 경제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장원 제도와 봉건 제도를 뒤흔들었습니다.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흑사병을 고치기 위한 노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신에 지나치게 의존하도록 하였습니다. 특히 일부 유럽인들은 유대인, 탁발 수사, 외국인, 거지, 순례자들이 흑사병을 옮긴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공격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다른 유럽인들과 같은 우물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오해를 사게 되어 테러를 당하게 됩니다.

유대인을 화형시키는 중세 시대 삽화

한편 흑사병은 교회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교적 믿음이 흑사병을 치료해주지도 않았고, 원인 조차도 파악하지 못하였고, 성직자들도 그저 피해다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흑사병을 신의 징벌로 본 채찍질 고행자들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기존의 성직자들보다 사람들의 신뢰를 더 많이 받았습니다. (*) 한편으로는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으니 끝나기 전에 마음껏 즐기며 놀자는 쾌락주의에 빠지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또한 흑사병으로 기존의 성직자들이 많이 죽으면서 성직자들의 자질이 떨어지고, 교회의 권위는 더욱 실추됩니다.

채찍질 고행자

또한 1350년대 이후 중세 유럽의 문화는 매우 음울하게 변하였고, 염세주의와 죽음의 묘사가 두드러지게 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흑사병을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 이러한 영향은 ‘죽음의 춤’이라는 그림에서 잘 나타납니다.

죽음의 춤

그리고 흑사병은 연금술에 대한 불신도 자아냈습니다. 이전까지 의술로 간주되던 연금술이 흑사병을 퇴치하는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거나 오히려 병세를 악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당시 의사들은 흑사병을 치료할 방법이 없어 모두 도망간 상태였고, 따라서 흑사병 의사 (Plague doctor) 라는 명칭의 지원자들이 흑사병 환자들을 진단하였습니다. 이들은 감염을 막기 위해 새부리 가면을 쓰고 (원시적인 마스크..) 긴 검은 겉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쓴 채 지팡이를 쥐었는데 (직접적인 접촉을 막기 위한 수단)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고 오히려 흑사병을 옮기는 숙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 한편 의학적으로는 환자에 대한 해부학적 관찰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닥터 쉬나벨 폰 롬

페스트는 이후에도 17세기까지 산발적으로 유럽을 강타했습니다. (****) 이 중 널리 알려진 유행은 이탈리아 흑사병 (1629년-1631년) 등이 있는데, 30년 전쟁 (1618 – 1648) 당시 군대의 잦은 이동이 흑사병 유행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천연두, 인플루엔자 등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 하지만 이들이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흑사병의 전파에는 더 기여하게 됩니다.
(**) 안타깝게도 이들은 고양이가 악마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고양이들을 많이 죽여버렸는데, 그 결과 쥐가 더 들끓게 되어 흑사병이 더 많이 퍼지게 해버립니다.
(***) 당시 민간에서는 닥터 쉬나벨 폰 롬(독일어 Doktor Schnabel von Rom , 로마 출신의 부리 가면 박사)이 흑사병 환자의 집을 방문하면 환자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속설이 퍼졌습니다. 닥터 쉬나벨 폰 롬은 당시 흑사병 의사들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 산발적인 유행이 있었던 연도: 1360–1363; 1374; 1400; 1438–1439; 1456–1457; 1464–1466; 1481–1485; 1500–1503; 1518–1531; 1544–1548; 1563–1566; 1573–1588; 1596–1599; 1602–1611; 1623–1640; 1644–1654; 1664–1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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