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8. 태산봉선(泰山封禪)
당고종에게 있어 2차 고당전쟁은 당태종의 그늘을 넘어설 절호의 기회이자, 치세의 황금기를 보증할 숙원 사업이었다고 평가된다.[8-1] 일찍이 당고종은 655년 황후를 무측천으로 교체하면서 장손무기 등 치세 초기를 주도하던 재상들을 숙청하고, 강력한 황제권을 …
당고종에게 있어 2차 고당전쟁은 당태종의 그늘을 넘어설 절호의 기회이자, 치세의 황금기를 보증할 숙원 사업이었다고 평가된다.[8-1] 일찍이 당고종은 655년 황후를 무측천으로 교체하면서 장손무기 등 치세 초기를 주도하던 재상들을 숙청하고, 강력한 황제권을 …
연개소문이 정확히 언제 사망했는지는 불명확하다. 당나라의 기록들은 666년 연남생의 청병을 기록하며 연개소문의 사망 기사를 덧붙였을 뿐 자세한 시점은 언급하지 않았다.[9-1] 반면 『일본서기』는 그 유명한 유언 기록과 함께 연개소문이 664년 10월에 …
2차 고당전쟁에서 당나라의 본래 계획은 신라군을 동원하는 것이었다.[7-1] 그러나 당시 한반도 남부의 상황은 당나라의 예상과는 상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660년 9월 소정방이 철수하자 백제부흥군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백제 지역에 잔류한 1만 …
612년 수양제가 요동 원정에 나섰을 때, 그에게 대적하는 세력은 오로지 고구려뿐인 것처럼 보였다. 돌궐의 흥기 이래로 중국의 오랜 근심이었던 북방은 보가가한의 몰락으로 말미암아 그 위세가 줄었고, 새로이 동돌궐의 지배자로 떠오른 …
661년, 당나라는 수륙 35군(軍)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다.[4-1] 처음에는 당고종도 친위대를 이끌고 친정하려 하였지만, 측천무후 등이 만류하자 결국 포기하였다.[4-2] 그래서 친정군을 제외한 35군만 여러 개의 행군으로 편성되어 고구려로 진격하게 되었다. …
660년의 백제 멸망전이 왜국에만 경각심을 심어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나라의 대함대가 평양을 노리고 있는 이상, 고구려는 당의 공격에 대비해야 했다. 다만 고구려의 대응책이 바다에 있지는 않았다. 세계 제일의 부국인 당나라와 …
백제가 서해에서 나타난 13만 명의 당군에 의해 멸망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13만 명의 수군 이야기를 자주 들어서 익숙할 뿐이지, 사실 7세기에 13만+a 명을 한꺼번에 바다에 띄워서 적국의 …
661~662년의 2차 고당전쟁은 고구려와 당나라의 두 번째 전면전이다. 그러나 넓게 보면 거란과 철륵, 백제 부흥군과 신라, 경우에 따라서는 왜국까지 관여한 국제전이기도 하다. 또 이 전쟁의 시작을 알린 당군의 상륙작전은 시대를 …
6. 나가며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과 응원을 얻으려 했던 상해파와 러시아 내의 공산주의 한 부분이 되려 했던 러시아화된 한인들인 이르쿠츠크파 간에는 상당한 간격이 존재했다. 동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이 코민테른 …
5. 대한의용군 자유시 참변의 승자는 이르쿠츠크파였다. 그러나 상해파가 전멸한 것은 아니었다. 참변 도중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고, 다른 지역으로 파견을 나가 있던 사람도 있었다. 특히 블라고베셴스크에서 군수품 지원 업무를 맡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