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어물, 노예 그리고 제국 – 1

# 1. 하나의 제국 : 건어물 홀릭에 빠지다.

한때 전세계 교역 네트워크의 한 흐름을 주도하고, 많은 사회에 영향을 끼친 교류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흐름이 시작된 발상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 시작된 곳은 바로…..! 

중화 5천년의 신비!! 두둥!!!

지금도 먹거리라면 사족을 못가리는 이 제국에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중국의 전통적인 중심은 화북지역에 있었고, 주류 식문화는 바로 이러한 화북의 풍습과 산물에 크게 좌우되었죠.1)

하지만 남송시대부터 조금씩 강남의 식문화와 재료가 주류 식문화에 침투하고 있었고, 이는 강남지식인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명이 제국을 통일하면서 결정적으로 되었습니다.

황제조차도 이제 식탁에서 말린 전복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세월이 지날수록 지식인들과 부자들은 전통적인 강남의 재료를 고급 식재료로 여기며 그 소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강남은 전통적으로 수향(水鄕)이라고 불리는 곳이었고, 그에 많은 어패류의 소비가 이루어지던 곳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고급스런 식재료 역시 어패류가 중심이 되었고, 이는 갑작스런 사회의 어패류, 건어물 소비의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순서대로 쌱스핀, 말린 전복, 제비집. 이들이 중화요리의 진미로 꼽힌 것은, 길어야 200~300년에 지나지 않는다.2)

그러한 건어물 홀릭 가운데서도 가장 인기가 좋은 물건(?)은 바로 해삼이었습니다. 특히 청대에 들어와 해삼은 사회 전반의 광범위한 호응을 얻게 되었습니다. 해삼이 인기를 얻은 것은 그 특유의 맛과 육즙 때문이기도 했는데, 사실 해삼이 인기를 얻은 가장 큰 이유는……..

길쭉하고 물렁한 것이 남자의 삐이(….)와 닮아서 정력에 좋다고 여겨진 것이었습니다. (…..)


정력증강에 불타는 명-청대 중국 남성동지들의 욕망3)과 별개로(…) 중국 국내수산업의 생산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만일 당시의 중국사회가 전적으로 전근대사회의 특성을 그대로 고수하는, 즉 ‘생산’과 ‘소비’가 결합된 사회였다면…이러한 소비와 기호의 흐름은 다시 도덕 및 종교 등의 문화적 운동4)을 통해 잠잠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송 이래로, 중국과 동아시아 사회는 전근대 사회이면서도 단순한 전근대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몇번의 ‘단절’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활성화된 해외교역은 중국사의 전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교역구조는 중국의 사회가 요구하는 ‘소비’가 ‘자국의 생산’과 관계없이 다른 국가, 다른 사회의 ‘생산’과 결합하여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는 구조로 조금씩 이행하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중국사회에서의 이러한 건어물 홀릭과 ‘소비’는 한때의 유행 혹은 소수층에 국한된 취향으로 사라지지 않고, 중국의 전통적인 교역구조와 결합하여 도리어 활성화 되었는데, 특히 그 중심에는 ‘남양(南洋)’ 즉 동남아시아와의 전통적인 교역망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제 동남아시아로 향합니다…..     

# 2. 또 하나의 제국 : 신접자로서의 불리함

중국과 전통적으로 교역을 해오던 동남아시아 해역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동남아시아에 서구세력이 17세기부터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었죠. 특히 영국은 바로 그러한 세력침투의 마지막 세력으로서 등장했습니다.  

17세기 중엽부터 영국은 초기에 동남아 여러 곳에 상관을 설치하고 대 동남아 – 대 중국 교역에 나서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암보이나 사건(1623년)으로 영국은 향료제도와 남중국해의 전통적인 교역망에서 한때 밀려났고, 일본과의 무역에서는 스스로 철수함으로서 일본 구리와 중국 생사의 교역이라는 16~18세기의 거대한 네트워크에서 소외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남중국해를 비롯한 ‘환중국해 지역’은 단순히 네덜란드로 대표되는 선두주자 이외에도, 터줏대감인 중국 상인, 인도 상인 등이 토착상인과 연계되어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5)
이러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영국 상인들과 세력진출의 흐름은 주요 상업지역에서 다소 떨어진 바깥지역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한편 서구에서 중국 물건에 대한 수요는 증가하고 있었고, 이는 영국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영국상인들은 이러한 대중무역에 조금이라도 참여하고자 하였고, 많은 상품을 중국시장에 가져다 팔음으로서 이에 대응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주로 판 것은 영국산 모직물, 인도산 면직물, 면화, 서인도제도산 설탕 등의 품목이었는데, 경제중심지이지만 덥디 더운 남중국의 기후에서 양모(…)따위가 팔릴 리는 없고, 중국 역시 면직물-면화와 설탕을 자체적으로 대량생산하면서 영국의 상품은 부분적으로 사들일 뿐이었습니다.

건륭제 왈 : “잉길리놈들아!! 천조에는 없는 물건이 없도다. 느껴라! 천조의 기술력을!!”

그나마 영국상인이 가져오는 상품 중에서 중국에서 제대로 팔리는 것은 백단향밖에 없었는데, 이것도 자연상태에서의 생산은 제한되어 있었고 당시로서는 아직 이것을 대량으로 얻어낼 방법이 전무했습니다. 돈을 벌고 싶어도 팔게 없었어요…OYL 

동남아에서도 구석탱이로 밀려나 상품이 안팔려 늅늅하고 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상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이 왔으니…그거슨 바로…

중국인들의 건어물 홀릭, 그리고 정력증강의 꿈(…)이었습니다.

파란 원은 위너들의 놀이터, 빨간 원은 루저들의 틈새시장(….)

 영국인들이 대체로 밀려난 외부해역, 즉 마카사르, 셀레베스 근방이나 필리핀 해역 등은 전복, 상어, 미역, 제비집 등이 풍부했고, 무엇보다도 해삼의 주요 생산지(!)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이 지역의 정치세력은 작은 부족단위나 소규모 왕국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영국 같은 루저(?)가 정착하기에도 좋은 여건이 있었죠.

영국인들은 이 지역에 재빨리 교역 기지와 네트워크를 건설하고 건어물과 해삼을 열심히 모아 팔 궁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강력한 라이벌이 하나 존재하였으니 바로……

# 3. 시장의 라이벌 

영국이 맞이한 라이벌은, 엉뚱하게도 동남아시아가 아닌 동아시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일본과 조선이었죠. 

나가사키 데지마의 모습. 나가사키에서의 중-일 교역량은 증가 추세에 있었으며, 특히 중국상인들이 네덜란드 상인을 압도하는 상황에 있었다. 일본측은 중국에 파견상인 수 제한을 요청할 정도였으며, 18세기 경에는 중국어 통역자만 해도 2000여명이 넘었다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사실 16~18세기 일본의 은-구리와 중국 생사간의 교역은 동아시아의 주요 교역 네트워크로 기능하였지만, 은과 구리의 산출량이 차례로 줄어감에 따라 퇴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일본 역시 중국의 이런 건어물 홀릭과 정력증강의 꿈(…)에 부응하고자, 18세기부터는 적극적으로 ‘다와라모노(俵物 : 흔히는 건해삼, 건전복, 상어지느러미의 3대 상품)’라는 건어물 생산과 유통을 국가(막부)에서 관리하고, 이를 적극적인 상품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합니다.     

조선 역시 일본만큼의 생산량은 아니었지만, 대중국 교역 결제수단인 은이 부족해지자 다른 상품 수출을 적극적으로 확장하고자 하였고 많은 양의 건어물들을 중국에 공무역-사무역의 형태로 수출하고 있었습니다.6)

이들은 동아시아 교역 네트워크에서의 중국의 전통적인 파트너였고, 동시에 양자는 적극적으로 중국시장에 자신들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으니 경쟁력이 꽤 우월한 편이었죠.

영국이 이들을 물리치고 나름의 중국시장에서의 건어물 경쟁력을 얻으려면, 상품의 대량생산과 그를 통한 가격의 할인(더욱이 조선-일본에 비해 운송비도 많이드는 원거리에 있으므로)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영국에게는 또 하나의 난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다음편에 계속….)        

—————————————————————————————————————
* 주석 (※ 주의 : 약간의 추측도 있슴다. ㄷㄷ)

주 1) 대표적인 요리에  대한 선호를 살피자면, 차(茶) 역시 당 말까지는 일종의 허브탕(?)으로 다른 재료와 섞어먹는 것이 관례였고, 그 자체만으로 먹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격’은 요구르트(乳酪)보다 낮은 것으로 평가받고는 했었다. 차의 위상이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역시 육우 본좌의 붐업(?)에 힘입어 송대 지식인들의 덕질이 가장 큰 원인일지도(….)

우월하신 고기님(…)의 성향을 살피자면, 송대까지도 선호되던 고기는 바로 양고기였다. 즉 북방의 풍토에 적합한 양이 고급요리로 대접받는 풍토는 남송 초기까지 이어졌는데, 남송의 고종은 ‘식사의 검소함’을 추구하는 와중에서도 양고기 혀 요리(…)는 즐겨먹었다고 하니. ㄷㄷ

사실 남방의 풍토에 적합한 돼지고기는 그닥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빈자조차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동파횽의 일화는 꽤나 유명한 이야기. ㄷㄷ

주 2) 보통의 통사에서 명대에 요리가 유행했을 것으로 보지만,상어지느러미는 귀해서 기록에 등장은 해도 종종 먹을 수 있던 것은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연회요리 등으로 종종 상식된 것은 대체로 18세기경 이후부터로 추정된다.

주 3) 서구인들은 중국인들의 해삼(을 포함한 젤라틴 식품에 대한 선호)에는 성적 코드가 결합되어 있다고 보고, 이를 ‘최음효과(‘라고 불렀는데, 사실 동아시아의 개념에서 성적 코드는 ‘최음’보다는 ‘자양강장(그리고 정력증강(…))’의 코드에 더 가까운 면이 있다. 오히려 최음을 중시(?)했던 서구문화권의 시각이 반영된 것 같아 흥미롭달까. 

주 4) 마빈 해리스도 식문화와 종교에 관한 관계에서 지적했듯이, ‘생산’과 ‘소비’가 결합된 사회에서 생산을 넘어서거나, 혹은 생산구조를 왜곡하거나 변질시킬 수 있는 욕망에 대해서는……도덕적-종교적인 기재의 문화적 태클(?)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앞서도 언급한 동파형의 경우도 양고기 대신 주변에 싸게 파는 돼지고기 많이 먹자는 소박한 도덕적 외침(…)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북송 말에는 마니교 채식당(喫菜邪魔)이 세력을 얻은 것은 이런 이유가 있을지도. ㄷㄷ   

주 5) 포머란츠가 지적하듯이, 이들 지역에서 중국상인과 인도상인들은 단순한 교역행위가 아니라 생산물-교역품의 집하와 수집-관리, 금융업으로의 종사, 현지민들과의 유대관계 등을 통해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서구세력들이 이들을 모두 몰아낸다면 교역구조 자체가 작살날 수 있었다. -_-;;

다만 기존의 네트워크에 편승할 수 있는 자리는 그닥 많이 남은게 아니어서, 바로 이 위치를 두고 서구세력은 경쟁과 공방을 서로 벌였다. 그리고 거기서 밀려난 루저 영국은 다른 곳을 향해서(….)   

주 6) 왠 조선이 여기서 튀어나오나 싶겠지만, 승정원일기나 실록자료에서 보이고 있듯이 조선 후기부터는 중국에 대한 예단품목으로는 말린전복, 해삼 등도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더욱이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이러한 물품을 충원하기 위해 북경사행들이 해삼 등의 물품을 요구하는 관행을 비판한 바가 있었다.

* 주요 참고문헌
쓰루미 요시유키, 이경덕 역,『해삼의 눈』(뿌리와 이파리, 2005)
케네스 포머란츠, 박광식 역,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심산, 2004)
오모토 케이이치, 김정환 역, 『바다의 아시아』1권 (다리미디어, 2003)
장징, 박해순 역 『공자의 식탁』(뿌리와 이파리, 2002)
시노다 오사무, 윤서석 역, 『중국음식문화사』(민음사, 1995년)
마리우스 젠슨, 김영우 역,『현대일본을 찾아서』(이산, 2006)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