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어물, 노예 그리고 제국 – 2

# 1. 브리타니카 잉글리아 상의 우울

동남아에서 구석(?)으로 밀려나게 된 영국인들은 해삼을 포함한 대 중국 건어물 교역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건어물 교역은 영국이 원하는 바대로 순탄하게 굴러가진 않았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 지역의 지역 공동체는 인구도 적을 뿐더러 작은 군소단위로 흩어져있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사실상 어로해역에 비해서 인구수가 적으면서, 대량생산을 시행할 만한 밀집인구가 적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때문에 이 지역에는 각 마을과 부락이 ‘바다의 유목민’들을 고용해 자신들의 어로수요를 충족하는 경우도 상당했고1), 이러한 각 부락과 마을을 토착상인2)들이 틈틈히 모아서 이를 중국인 도매상에게 넘기는 식이었죠. 

중국시장의 수요부응과 가격 할인을 위해 대량생산을 바랬던 영국인들의 욕구에 충족하기 위해서는 ‘사람’자체가 부족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생산-유통구조로는 영국민들이 바라던 ‘생산 자체의 증가’를 의도하기는 매우 힘들어보였죠.이에 영국인들이 내릴 수 있는 선택은……

① 적극적으로 인력을 돈을 주고 고용한다. 

② 카리브해에서 그랬듯이, 만만한 놈을 잡아와 부려먹는다. (!)

③ 일본을 공격한다. (….)

200년쯤 후에 어느 나라가 주로 선택할 방식(…)

①의 방식은 가장 타당한 선택이었겠지만, 전술한대로 동남아시아 주요 해역에서 다소 ‘변두리’로 간주되던 마카사르, 필리핀해 해역에서 대량의 해외유입을 감당할 수 있는 인적 교류망과 여건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고, 생산단가의 증가를 바라지 않던 영국인들도 원하지 않았던 바였을 것입니다. 

남는 것은 ②의 방법이지만, 여기에도 나름의 난제가 있었습니다. 일단 태평양에서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었고(….) 더욱이 해삼, 다시마, 전복 등은 단순히 그물로 흩어내는 것이 아니라, 심해에서 잠수를 해서 채취하는 숙련스킬(…)이었으므로 근력노동을 주로하는 설탕 플랜태이션과는 성격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었죠.

(해삼을 가공하는 일도 여간 고역이 아닌데, 몸이 거의 수분인 몸에서 수분을 뽑아내고 내장을 가르는 이런저런 가공을 하면 전체에서 5~10%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는 대체로 여성노동력이 투입되었죠.)③의 경우는 실제로 네덜란드가 향신료제도 자체를 점령해서 생산 자체를 통제해버린 방식이 대표적인데, 아무리 그래도 동인도회사 따위가 덤비기엔 일본과 조선은 좀 ㅎㄷㄷ한 나라들이었을 뿐

결국 건어물의 대량생산을 위해 종래의 생산-유통구조를 깨트려야 했지만, 현지인(즉 해양민)들의 숙련 스킬을 이용하면서도 종래의 토착구조에 온존할 수 있는 새로운 ‘중간단계’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인들은 그 해답을 의외의 곳에서 찾게 됩니다.

# 2. 필리핀해의 중심에서 이슬람을 발견하다.

17세기경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스페인은 모든 필리핀 제도에 대한 지배력을 뻗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수의원주민들의 토착공동체와 이슬람 술탄국들이 대립하는 양상에 있었죠. 그리고 그 가운데서 유독 눈에 뜨이는 한 곳이 존재했습니다.

빨간 원이 술루 왕국이 있던 술루제도, 파란원은 전통적인 해산물 집결지인 마카사르(현 우중판당) 

영국인들이 침투해 들어갔던 필리핀해 인근에는 ‘술루(Sulu, 중국 사서에서는 蘇綠)’라고 하는 왕국이 있었습니다. 이 왕국은 스페인의 침입에 저항하기 위해서 다량의 화기와 돈을 필요로 하고 있었죠. 

그리고 이 왕국은 무슬림왕국으로서 스페인과 주변 토착종교민들과 싸우면서 해적질과 포로약탈에 이골이 나있던 차라, 술루 왕국의 사회에는 다수의 생산노예들이 존재했습니다. 

영국인들은 여기에 착안하여, 이 왕국을 일종의 파트너쉽을 구축할 궁리를 하게 됩니다. 18세기에 들어와, 영국은 이 왕국에 총포의 지원 뿐만 아니라, 다량의 상품 쿼터를 구입하겠다는 무역협정을 제안하였으니….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군사협조와 중국시장 박치기(….)’를 제안한 샘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술루 술탄의 마음 속.jpg

이런 엄청난 제안을 술루 국왕이 거절할리가  없었고, 대신에 술루국왕은 영국인들에게 일정량의 수출품(대체로 건어물)을 정기적으로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영국이 실패했던 이런 해산물 쿼터의 충족을 술루 국왕은 어떻게 해결하려 했던 것이었을까요.        

# 3. 술루술탄의 해결책,그리고 그 결과.

1) 지역에서의 민폐(…)

역대 술루 술탄들이 내린 해결책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즉 노예를 잡아와 일을 더 시키는 것이었죠.(….) 다만 그 약탈대상이 주변 현지인이 대상이 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기존 네트워크와의 교역관계 및 신용에 대한 의식과, 스페인-네덜란드와의 평상시 우호관계 때문에라도 ‘더러운 일’에 쉽게 손을 델 수 없는 영국을 대신해서, 현지인 사냥(네덜란드, 스페인 식민지에 거주하는사람조차도 잡아올 수 있는)이 용이하다는 것이었죠. 

더군다나 영국인이 제공해준 총포로 술루의 무력까지 강화되어 스페인의 공격을 몇차례 격퇴한 이후로, 이 지역에는 스페인의 세력이 잠시 후퇴하고 술루 술탄의 힘이 우세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술루 술탄이 적어도 인근 지역에서는 무력적 행위를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이 지역에 파국적인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이 지역에도 노예와 노예노동은 존재했었지만, 그것은 과거와 달리 시시한 잔업(?)수준이 아니라, 주요한 ‘산업(industy)’이 되고, 그 ‘산업’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유통망’과 결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죠. 

때문에 주변의 국가와 공동체들은 몇 차례의 해적질 정도가 아니라, 18세기에는 아주 술루 술탄의 속국이 되거나 약탈권이 되어 정기적으로 인력을 공급하게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그들의 공격이 얼마나 파괴적이었는지는, 말레이 어에서 ‘해적’을 의미하는 단어인 ‘라눈’이 술루 해적의 주요한 구성원이었던 ‘이라눈’ 부족에서 기인했다는 점과, 원래 해상교역의 중심지였던 테르나테 지역의 마을들이 해안에서 내륙으로 이동하게 된 것 등등, 현대에까지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더 암울한 것은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고(…)

종래에는 해적질과 노예업에 종사하지 않던 지역공동체가, 아주 해적질과 사람사냥을 주업으로 하는 양상이 벌어지게 됩니다.3) 여기에 중국인, 베트남인 해적이 가세4)함에 따라 이 지역의 말 그대로 ‘지옥의 바다’가 되어버리고 말았죠. (…)       

“나도 F1레이서가 될테다!”  ……대략 이런 상황(…..)

그러한 지옥같은 바다의 정점에는 술루 왕국과 그 제도들이 떠있었습니다.    

2) 술루 내부에서의 노예제 운영 – 신분제의 다층화와 발전(?)  

보통 상업과 교역이 발전하면, 나오는 테제가 “새로운 부를 축적한 이들이 탄생하여 신분제와 봉건제가 붕괴된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례는 술루왕국에서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즉 외부세력이 지배층과 결탁함으로서, 지배층의 무력과 군사적 승리를 통한 위상은 강화되었고, 오히려 해삼, 전복 등을 채취하는 산업의 형태가 가진 특성은 전통적인 신분제와 결합해서 운영될 수 있는 소지가 있었죠. 

우리네 해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잠수 잘할 줄만 안다고 해서 많은 수확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경험치가 누적된 고렙(?)일수록 수확물을 많이 거둘 수 있고, 동시에 서인도제도처럼 섬의 농장에 가둬둘 수도 없는 성격의 일이었기에5), 일정부분의 이득을 만들어 도주-이탈을 막고, 서열을 만들어 경험자를 우대해주는 체제가 있어야 했죠.

신분제는 이러한 요구조건에 걸맞는 것이었습니다. 즉 나름의 재산 축적만 어느 정도 허용해준다면 노비들은 재산의 축적과 경험의 축적으로 인해 바로 윗 계층으로의 나름의 지위 상승이 가능했었죠. (실제로도 함대의 사령관이나 술탄의 대신이 된 노예도 존재-_-)
또한 “노예가 노예를 소유할 수 있는”식의, ‘노예제 내부에도 다양한 신분층위’를 만들어 특권과 위상의 부여-통제를 통해서 노예층을 분열시키고, 주요한 노예들을 포섭하려는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더욱이 술루의 노예 사역환경은 서구의 ‘대농장(라티푼디움이나 플랜테이션 등의)’체제와는 다른 면이 있었는데, 개별 술루인 마을과 부락 단위에 노예들이 각각 흩어져서 술루인 마을공동체의 통제 하에 해삼 등의 해산물을 채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국가는 여기에 해산물 얼마씩을 정기적으로 연공으로 바치게 하는 방식이었죠.

이는 마을공동체에서 제공하는 일종의 공동체적 온정(?)을 노예들에게 제공하여 사회적 긴장을 완화하면서도, 동시에 다수를 집결시킴으로서 유발될 수 있는, 대량의 노예 탈주나 반란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보다 효율적인 체제(?)이기도 했습니다.

술루 왕국은 이러한 ‘나름의 유연한 노예제’를 통해 노예들의 반란을 막고, 자신들의 사회를 유지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유연한 모습이 있었다고 해도 대부분의 노예는 심해에서 생산물을 수확해야하는 노동에 시달리다 죽어갔을 것입니다.

온정적인 신분제와 노예제따위란 아무리 유연해도 이따구일 뿐이지.jpg



그리고 상업과 유통이 발달한 정도가 아니라 결합한 그 지역에서 ‘신분제의 붕괴’와 같은 ‘속칭 진보’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강화되었죠.




# 4. ‘노예’에 의존하는, ‘자유무역지대’의 탄생 

하지만 영국에게는 그런 노예제 따위는 상관없는 문제였습니다. 술루왕국의 노예제는 어쨌든간에 인구 자체는 물론 밀집인구가 적어 해산물의 대량 생산이 힘들었던 그런 정황을 타개하고 영국에게 대량의 상품을 제공해주었으니깐요. 물론 그런 술루의 확장이 ‘영국 덕분이라는’사실은 별개로 치더라도 말입니다.
 
각설하고, 영국은 술루왕국을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이 독점하는 지대로 남겨둘 생각은 없었습니다. 당나귀 삐이~를 말려서 가짜 해삼으로 판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6)로 대륙의 시장은 폭발적인 수요증가에 있었고, 영국인 자신들이 팔만한 수요를 채우고도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 틈새에 다른 서구세력이 끼어들기 시작합니다. 

1776년 독립 이후로, 미국의 상인들은 일찍부터 대양진출을 모색했고, 그 노력은 18세기에 중국과의 통상관계를 맺는 것으로 동아시아에도 소급되게 됩니다. 미국인들 역시 이러한 중국의 수요에 부응하여 ‘틈새’를 노렸고,그들의 발길 역시 술루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19세기경에 독일은 정치적 통일을 완수했지만, 18세기 말부터 독일 상인들 역시 해외진출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뒤늦은 후발주자인 그들 역시 동아시아로 진출하려 하면서, 상품이 필요했고 그 발길은 역시 틈새시장인 술루로 귀착되었죠. (실제로 술루의 일부 지역에는 ‘게르만’이라는 용어에서 파생된 독일 상관 및 상인들 거주지가 몇몇 남아있다고 합니다.)   

각 국 상인들의 발길은 술루를 일종의 ‘자유무역지대’처럼 흥청거리게 만들었고, 그러한 술루는 19세기 말까지 독립을 유지하게 됩니다.   

물론 그 ‘자유무역지대’의 유지를 위해 더 많은 노예가 필요했고,이는 18세기 말 네덜란드가 자바에서 플랜테이션을 시작하기로 결정과 맞물려 이 시기의 노예수요를 결정적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이러한 문제와 상관 없이, 자신들이 광동으로 상품을 팔러가는 동안 더 수익을 낼 수 있는 궁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궁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엉뚱한 결과’를 하나 가져오게 되었죠.     


(다음편으로 넘깁니다. ㄷㄷ)

이제 정확히 2편이 남았군요. 전편에 비해서 재미가 없을겁니다. ㄷㄷ 현재로서는 2편을 더 구상하고 있고. 그걸 통해서 이번 시리즈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기대하셨던 여러분들께 죄송합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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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1) 원래 이 지역 전통부락과 부족들은 어로 뿐만 농경에도 종사하고 있었고, 때로는 농경에 중심을 두다보니 어로 자체도 일손이 부족한 때가 많았다. 이런 때에 나타난 것이 보통 농경이 잘 안되는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로(비자야 족이 대표적), 이들은 농경부락마다 찾아다니며 기간 혹은 쿼터를 정해서 물고기를 잡아주는 대신 곡식을 받기로 약속한다. 

대신에 이들이 먹튀(?)를 하지 못하도록 계약기간 혹은 조업기간 동안에는 그들의 아이들과 처자들은, 계약 대상이 된 지역에 남아서 생활하는데, 이런 습성이 마치 ‘유목민’과 같다고 해서 ‘바다의 유목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다른 점이라면 약탈과 분쟁도 몇번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관계가 주가 된다는 점이랄까.   


2) 이러한 전통적인 어물 수집 상인들의 선두주자가 된 이들은, 바로 ‘마카산’이라고 불리는 마카사르 지역의 상인들이 대표적이었는데, 이들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곳까지 뻗어나가 해산물을 수집하곤 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4편의 주제가 될 계획(…)


3) 술루 왕국이 주도하는 해적질 외에도, 귀족과 호족들, 그리고 다른 지역의 토착세력이 주도하는 해적질이 성행하기 시작했는데, 배의 급수차이도 대형 범선에서부터 소규모 노젓는 보트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개나 소나 해적질과 사람사냥에 뛰어든 것이었다. ㄷㄷ 


4) 중국 남부에서의 반란과 치안 악화, 그리고 베트남에서의 타이선 당 반란 등으로 당시의 바다에는 이러한 중국 반군의 패잔병, 비밀결사, 베트남계 해상세력 등등의 가지각색의 해적들이 첨가(?)되었다.


5) 노예들을 플랜테이션식으로 대량으로 모아 관리하는 것은 관리 자체가 힘들었을 뿐더러, 반란은 막는다 해도 탈주를 완전히 막을수는 없었다.그리고 이러한 노예들의 탈주 자체는 생산물의 생산 단가를 올리는 문제도 발생했는데(즉 새 노예를 구입해와야 했으므로), 도망칠 곳이 많았던 브라질과 수리남 등에서는 실제로 발생한 일이기도 했다. 


6) 쓰루미는 『식물본초』에서 나오는 얘기라고 레퍼런스를 달았는데,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만큼 해삼 수요가 많았다는 얘기로, 그리고 중국인들이 해삼에 어떤 이미지(?)를 투영하면서 기대(?)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만하다.


 *  주요참고문헌
쓰루미 요시유키, 이경덕 역,『해삼의 눈』(뿌리와 이파리, 2005)
케네스 포머란츠, 박광식 역,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심산, 2004)
오모토 케이이치, 김정환 역, 『바다의 아시아』3권 (다리미디어, 2003)
엥거스 컨스텀 저, 이종인 역『해적의 역사』(가람기획,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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