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어물, 노예, 그리고 제국 – 3

(본 게시물은 혐짤을 하나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 요망을 바랍니다. ㄷㄷ)


# 1. 미스테리 유적 발견?  

18세기 중엽이 되자 동인도제도에서의 전통적인 패자였던 네덜란드의 세력이 퇴조하고, 유럽 각국은 동인도 제도를 포함한 태평양에 대한 탐사를 본격화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대륙’이 발견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이었죠. 이러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존재에 대해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경쟁적으로 탐험대를 보냈고, 이는 한동안 호주대륙 주변에 수많은 배들이 오고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런 배들이 오고가던 와중에, 1802년 11월, 인베스티게이터 호로 북 오스트레일리아 해안을 탐사하던 메튜 플랜더스 선장은 이상한 흔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분 말고 (….)

오스트레일리아 토착민족인 에버리지니는 정주생활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의 시야에 보이는 구조물은 분명히 돌로 된 구조물이었던 것이죠. 더욱이 돌로 된 구조물 주변에는 불을 피워서 생활했던 흔적까지 남아있었습니다. 

플린더스 선장은 궁금해하면서도 배의 수리와 측량을 위해 몇 개월간 그 지역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수수께끼의 구조물을 근성으로 주시하고 있었죠.

그리고 3개월 정도후, 그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마주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의외의 사람들이었죠. 

플랜더스 선장의 근성(?)이 아니었다면, 그 유적은 이딴 책에서 ‘뮤우 대륙의 잔재’운운 소리를 들으며 실렸을지도(……)

# 2. 미지의 대륙? 전혀 아니올시다. 

그들에게 다가온 것은 말레이인, 정확히는 ‘마카산’으로 불리는 마카사르 출신의 선단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바로 해삼을 비롯한 해산물을 잡기 위한 것으로, 그 돌로 된 구조물은 그들이 해삼을 잡으러 올때 지내는 일종의 ‘임시 어업기지’같은 곳이었던 것이죠.

더욱이 그 마카사르 인들은 선물로 술을 챙겨가면서 이슬람교도임에도 근처 해역에는 자신들과 같은 선단이 60척이나 있다는 정보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즉 그 해역은 이미 마카사르인들의 상시적인 조업구간이었던 것이죠.       

다시 써먹는 동남아 지도. 파란 원이 바로 마카사르(현 우중판당), 이 지역은 지금도 해산물 집결의 중심지이다.

북쪽의 필리핀해에서는 술루왕국이 노예제를 통해서 해산물의 수확을 확대하고 있었던 반면에, 남쪽에서는 이들 마카산들을 중심으로 한 토착상인-중국상인 간의 교환구조가 계속해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중국시장에 수출할 해삼의 확보를 위해 계속해서 매입로를 확대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자신들이 조업선단을 꾸리게 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조업선단은 단순한 어부 몇몇의 때거리가 아니라, 마카사르 상인들과 중국 상인, 지역 유력자들의 투자 형식으로 조직적으로 운영되고1) 있었죠. 

이러한 마카산들은 조업구간을 확대하다가, 1650~1700년대경(혹은 더 이전에)에 북오스트레일리아 해안에 도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단순히 조업하는 것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과도 일종의 협력관계를 맺었는데, 원주민들에게 쌀과 각종 생활용품을 제공해주고 대신에 해삼과 해산물을 제공받기로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해삼 가공에 원주민들이 이따금씩 참여하기도 하는 일종의 산업구조(?)가 형성되었죠.2)  

사실 서구인들은 처음에 북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버리지니 주민들과 접촉하면서, 이들이 정주생활을 하는 것이 아님에도 쌀과 술을 먹는 광경에 종종 놀라곤 했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파푸아뉴기니나 호주 대륙에서는 쌀이 재배되지 않았으니, 결국 이들의 쌀 식습관도 이러한 동남아 상인들의 진출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것이죠. 

(심지어는 몇몇 해변의 지명에는 마카사르어의 흔적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일례로 오스트레일리아의 ‘테리 지니니’는 마카사르어 ‘투리 주네’에서 왔는데, 이는 ‘사람+물’로 즉 ‘어부’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원 거주자인 애버리지니들에게는 물론, 동남아인들에게도 호주는 결코 ‘미지의 대륙’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거주자가 있었고, 그곳의 거주자들이 타 문명과 ‘교류’하면서, 나름의 삶을 영위하고 있던 ‘또 하나의 세계’였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더러 ‘미지의’, ‘고립된’ 운운이라니!! 이거나 쳐먹으라능! 뿌우우우~~!

# 3. 우연한 발견

기존의 마카산들에게 이와 같이 북 오스트레일리아 해역이 ‘선점’된 반면에, 이들이 진출하지 못한 수역에서도 영국인들은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발견은 정말로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죠. 

그리고 그 사건 역시 놀랍게도 플랜더스 선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1803년에 북 오스트레일리아 측량을 마친 그는, 원시적인 식민지였던 시드니에서 다시 3척의 배를 타고 산호해 방향으로 출항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8월, 최대의 산호초 지역인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에 다다렀을 때. 

그가 타고 있던 배들은 차례로 산호초에 걸려서 좌초되었습니다. (….)

플랜더스 선장의 심정

마지막으로 그가 탄 가장 큰 배였던 브리지워터호도 침몰되어-_-;; 선원들에게는 오징어잡이 배 수준의 작은 배 2척만 남아 있었죠.
그래서 노약자를 태운 한척은 시드니로, 플랜더스 선장이 탄 배는 보고를 위해 인도네시아를 통해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했고3), 미처 다 태우지 못한 사람들은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섬에 남아 캐스트에 어웨이(…)를 찍었을 이들은 다행히도, 프랜시스호의 구조를 받아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프랜시스호의 선장인 아이킨은 인간이 돈벌이를 좀 밝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침몰한 배를 건져보면 좀 뭔가 나오지 않을까? ‘ㅅ’? “

이런 싹싹한 마인드(…)로, 총독에게 인양작업 지원을 요청하고 작업팀과 함께 다시 그 암초를 향해 갔습니다. 그렇게 선체를 인양하다보니…아이킨은 뭔가(!)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양의 해삼이었죠. 아이킨 선장은 교역의 경험이 있었던 사람인지라 그 광경을 보고 외쳤습니다. 

“이걸 광동에 가지고 가서 판다면 1톤에 50파운드라능! +_+” 4)

아이킨 선장의 눈에 아른거렸을 떼부자의 꿈.jpg




아이킨은 즉각 해삼 견본을 들고 시드니로 돌아갔고, 시드니는 극도의 흥분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호주 총독은 그의 해삼사업을 전면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했죠. 그렇게 해삼은 마카산들 이외에도 백인들에게도 맥나이트의 표현을 빌자면, ‘호주 최초의 산업’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남태평양에서 조업하던 미국의 포경선들도 1810년경에 피지나 통가 등의 제도에서 해삼과 해산물들이 대량으로 생산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리하여 그레이트 베리어 리프에서부터 타히티에 이르는 지역은 해삼 때문에 다시 흥청거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지역은 동남아시아보다도 밀집인구가 적은지역이었고, 더욱이 해삼의 채집과 가공과정은 역시 숙련된 기술력을 요구한다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취해진 선택 역시…


일할 놈을 잡아와서 시키는 것(….) 이었습니다.(….) 태평양 각 섬에서 원주민들을 잡아다가 해산물 채취에 종사시키는 것외에도 호주 내부의 내륙 개발을 시행하기 위해서 태평양 주변의 섬들은 다시 노예사냥의 서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더욱이 이곳에는 동남아 수역처럼 눈치를 봐야할 기존 네트워크도 없었고, 이 시기 영국의 해상력은 피크를 달리고 있었으니, 17세기경 필리핀해에서와 같이 중간단계를 거칠 필요도 없었고, 더욱 수월한 노릇이었습니다. 
 
나아가 이런 노예사냥은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 독일, 이탈리아 등의 후발 제국주의 열강 등의 회사들도 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업은 ‘블랙 버딩’으로 불리며 영국이 공식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했음에도 존속했었죠.5) 

잭 런던에 의하면 19세기 말에도 이러한 블랙 버딩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취재기로 남긴 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블랙 버딩의 흐름이 멈추어진 것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어 중국인, 일본인, 필리핀인 노동력과 잠수부들이 대량으로 내려올 수 있을 때에야 멈추어지게 됩니다.        
 
한편 영국 당국은 이러한 해산물 산업을 좀더 장악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마카산’들의 북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교역을 차츰 제한하다가, 결국 백호주의가 강화되는 1907년에는 마카산들의 상륙 자체를 금지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토착 애버리지니 공동체는 각각의 ‘보호구역’으로 격리되는 조치에 취해지게 되죠. 


이와 같이 ‘또 하나의 다른 세계’가 ‘또 하나의 상품생산 기지’로 전락하게 되고, 이에 따라 상품공급지로서 종래의 선두주자(?)였던 술루 왕국의 위상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술루 왕국이 완전히 나가떨어지게 되는 것은 마지막 하나의 단계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인들은 자신들끼리도 논쟁을 벌였지만, 결국 그 단계를 시행하게 됩니다.  

    
(다음편으로…..)


후우..드디어 이제 마지막 편이 남았군요. 이제 이 시리즈도 길어질수록 재미가 없어지니, 다음편에서 끝장을 봐야겠습니다. -_-;
나머지 못 다한 이야기들은 번외편이나 외전으로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모두의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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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1) 사실 마카사르 지방은 술루와 달리, 농산력이 어느 정도 되는 곳이라는 특색이 존재한다. 오히려 이런 특색이 마카사르인들을 근처 조업이나 하는 연안 어부나 ‘바다의 유목민’으로 만들지 않고, 보다 큰 배를 만들어 원양으로 나아가게했을 여유를 주지 않았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2) 사실 호주 대륙에 있던 모든 에버리지니 공동체가 이러한 동남아와의 교역에 종사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서구인들의 생각대로 ‘고립된’ 공동체로서, 미지의 상태에서 정체하고 교류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불식시키는 데에는 충분할 것이다. 


3) 우리의 주인공 플린더스 선장은 캐스트 어웨이 촬영을 모면했지만, 보급땜시 프랑스령 모리셔스에 기항했다가 그곳에서 아미엥 조약의 파기와 영-프 전쟁의 재개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억류되어 7년간 올드보이를 촬영하게 되니…. 참고로 본국에는 탐험때문에 8년을 혼자둔 온 아내가 있었다….결국 아내님은 8+7년을 기다렸단 얘기니…..(…)……지못미….▶◀ 


4) 지금이야 1톤에 50파운드라면 껌값이지만, 1803년 당시 영국 육군 병사들의 일당이 1일 1실링이었다는 점을 상기하자. (더군다나 당시 영국은 모병제 ㄷㄷ)
당시의 교환비인 ‘1파운드 = 20실링(shillings), 1실링 = 12펜스(pence)’의 공식을 따르면, 해삼 1톤을 판 돈은 1000실링으로 병사 한명의 3개월 봉급에 육박하는 수치이다. 물론 상품의 질에 따라서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가정은 제외한 것이다.    


5) 사실 남태평양의 인력 동원 형태가 노예제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틈틈히 인력고용의 흔적도 발견되곤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엽까지는 이러한 인간사냥과 노예제가 계속해서 시행되고 있었고, 영국 본국에서 노예제를 금지한 이후로도 계속되는 역설이 존재했었다. 

많은 사학자들은 이스터 섬의 예를 ‘환경고갈’과 ‘황폐화 된 작은 지구’의 논리로 설명하는데, 이에 반대하는 다른 사학자들은 이스터섬의 황폐화와 인구감소를 서구인들의 백단향-목재 채취와, 전술한 ‘노예사냥’ 탓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좀 추이를 두고 볼 일이고….

참고로 비스마르크 역시 친구이자 상인인 고트프로이에게 배상금의 일부를 출자해줬는데, 고트프로이는 바로 이러한 자본으로 해삼-노예의 교역에 끼어들고 남태평양으로 진출했었다. 그리고 그러한 고트프로이의 활동이 독일의 남태평양 진출을 자극하는 기재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 ㄷㄷ


* 주요 참고문헌
쓰루미 요시유키, 이경덕 역,『해삼의 눈』(뿌리와 이파리, 2005)
케네스 포머란츠, 박광식 역,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심산, 2004)
오모토 케이이치, 김정환 역, 『바다의 아시아』3권 (다리미디어,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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