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어물, 노예 그리고 제국 – 4

# 1. 중국 해관체제의 이중성 : 중국 상인의 존재


*중국 백과사전의 분류기준

1.황제에 속하는 동물, 2.향료로 처리하여 방부처리된 동물, 3.사육동물 ..(중략)….13.물주전자를 깨뜨리는 동물, 14.멀리서 볼때 파리같이 보이는 동물

– 보르헤스, 『cierta enciclopedia china』, 서구와 다른 중국의 분류체계를 운운하며. *


보르헤스가 어떤 ‘중국의 백과사전’을 참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중국인들은 서구인들과 다른 분류체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해삼을 비롯한 건어물도 마찬가지여서 서구인들이 해삼을 모양과 색 등의 생물학적 기준으로 분류했다면, 중국인들은 ‘맛’으로 분류하곤 했었죠.1)

궁극적인 상품의 판매처가 바로 중국인 이상, 이러한 상품의 분류-유통과정에서 중국상인들을 완전히 배제하거나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실제로도 중국 상인들은 15세기부터 동남아 각지에 흩어져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중국의 무역체제도 이런 양상에 한몫을 했는데, 일견상 중국의 무역체제는 광동 1곳으로 외국상인의 입항을 허락하여 폐쇄적으로 보였지만2), 사실상 중국 상인들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은 사실상 규제하지 않고 있었습니다.3) 이런 중국의 입장을 종합해 보자면…..한마디로.


“너희 오는건 제한하지만, 우리 애들 나가는건 사실상 안막음. ㅋㅋㅋㅋㅋㅋㅋ” 




도둑놈 심보 맞습니다. (….) 하지만 18세기 말까진 중국이 킹왕짱 맞는데 어쩝니까. (…..) 영국인들은 슬슬 광동 1항에서의 교역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여기면서 불만이 누적되었지만, 영국인들이 이 정치적 구조를 어찌할 만한 힘은 아직 없었고, 동시에 해삼과 건어물 교역에 있어서 중국인들을 배제할 수는 없으니, 이들 중국인 상인들과 네트워크를 포괄하면서도 수익을 올리게 되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희망(?)은 본국정부의 의사조차도 무시할 정도로 대담한 한 명의 인물에 의해 구체화되게 됩니다.       



# 2. 여기에 한 남자가 있었다 : 한 도시의 탄생 

19세기로 들어올 무렵. 영국에는 한명의 특이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괴상하게도 동양언어에 관심이 많아서 중국어, 말레이어, 힌디어 등을 마스터하면서 동양에 대한 관심을 쌓아 나갔습니다.

그런 그는 동인도 회사의 견습사원에서, 피낭지부의 지부장이 되었고, 나아가 1811년 영국의 자바원정군이 나폴레옹 편에 선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점거할때 서열 2위의 문관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 입지전적인 남자의 이름은 바로. 동남아시아사왕 영국 제국주의 진출사에서 획을 긋게 될 이름….


‘스템포드 레플스’였습니다. 


자바를 항구적인 영국의 식민지로 만드려던 그의 노력은, 나폴레옹 전쟁 후 네덜란드를 영국의 우호국으로 끌어들이려던 영국정부가 자바를 네덜란드에게 돌려주면서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1816년, 그는 자바에서의 ‘월권’행위에 대한 처벌로 말레이반도의 벵쿨렌으로 좌천되게 됩니다.

벵쿨렌으로 좌천된 그는 지역의 상업과 유통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었고, 특히 해삼과 건어물의 교역과 그 유통형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4) 그는 영국이 각지에서 수입하는 해삼과 건어물의 유통을, 기존의 중국 상인들이 각지에서 해삼과 건어물을 사들이는 유통과 ‘결합’한다면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으리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은 레플스의 뇌내망상이었을 뿐, 현실화 되기엔 너무나도 멀어보였습니다. OYL 

그러나 의외의 상황이 레플스를 도와주게 되었으니……..그것은 바로 자바를 돌려받은 네덜란드 정부의 병맛 조치였습니다. 



녹색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은 말라카, 빨간색은 팔렘방, 파란색은 반탐. 이들지역은 원래 전통적인 교역 중심지이자 기항지로서 네덜란드의 지배하에 있었다. 검은색은 나중에 등장할 조호르 지역의 위치.   


네덜란드는 원래 전통적인 동남아 교역의 중심지, 즉 말라카와 반탐, 팔렘방 등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 전쟁 이후 네덜란드 정부는 재정난에 쪼들렸고, 본국의 세금을 올릴 수 없으니 결국 식민지의 착취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악명높은 ‘강제제배제도’가 네덜란드령에 도입되었고, 각 항구에는 고율의 기항세와 관세가 메겨졌습니다. 또한 네덜란드는 포함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항구에 기항하지 않고 다른 항구에 정박하려하는 다른 선박들을 격침시키거나 단속하고 다녔죠. 

이런 네덜란드의 조치는 대형선을 끌고 다니는 영국 동인도회사나 중국의 거대상인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선박을 운영함으로써 기항과 보급을 자주 받아야했던 중소 중국상인, 인도상인, 토착상인들에게는 위협적인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조치는 바로 이런 것 (….)




이들 상인들에게는 “세금이 적으면서도, 안전한 기항지”가 필요했고, 그 기항지가 생긴다면 동남아시아의 해삼 및 건어물 유통 뿐만 아니라 상업유통을 모두 휘어잡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었죠. 

하지만 영국정부는 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가급적 네덜란드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정치적인 배려가 있었고, 그러한 기항지의 개발이 네덜란드의 조치를 무력화시킬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레플스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었고, 켈커타 총독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때립니다. 편지의 내용이란….


“네덜란드의 조치 때문에 광동-켈커타 교역 다 망하게 생겻음 ㄳ”

 
거짓보고와 뻥튀기, 반 협박(….)으로 점철된 서한을 통해서, 레플스는 켈커타 총독에게 조치에 대한 모호한 대답을 받고 행동에 나섭니다.5) 보다 구체적으로는 조호르 술탄국의 내분에 개입해서 조호르의 맞은편에 있는 한 작은 마을을 얻어낸 것이었죠. 그곳은 ‘사자의 마을’ 즉 싱가포르라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1819년, 레플스는 즉각 그 마을에 항만시설과 도로, 총독부를 설치하고, 면세와 자유기항을 조건으로 상인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중국상인, 토착상인, 인도상인은 물론 서구의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작은 어촌은 순식간에 수만의 인구를 가진 항구로 기능하게 되었죠.

그리고 여기서 레플스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즉 영국상인들이 술루, 호주, 남태평양, 기타 동남아 해역에서 가져오는 해삼과 건어물의 유통과, 전통적인 중국 상인들의 교역망을 결합한다는 목표가 말이죠.

실제로 싱가포르에서는 중국상인들이 얼마만큼의 해삼 및 건어물 구입의 쿼터를 책정하면 영국상인들이 이를 각지에서 모아오는 방식으로 유통이 이루어졌고,6)  이는 싱가포르 자체를 더욱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국시장으로의 진출에 있어서 광동 1개 항에서의 교역에 불만이 상당했던 영국 상인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누그러트리고 영국의 이익을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싱가폴의 주요 구성원이 중국인인 것도, 임노동자로서의 쿨리 이외에 이런 상인의 유입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내가 해삼이나 전복 찌끄러기들 덕분에 이만큼 컸다고?



싱가포르가 이렇게 ‘자유무역지대’가 되고 융성하게 된 이상, 해적들로 들끓는 술루왕국은 자유무역지대는 커녕, 기항지로서도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고, 영국의 해삼 및 건어물 공급처는 다변화된지 오래였습니다.

결국 술루왕국은 종래 독일, 미국 등의 다른나라 상인들까지 몰려들던 교역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상실했을 뿐더러, 원료의 주요 공급지로서도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죠. 

그런 술루 왕국의 해적 및 노예제를 발전 시킨것도 영국이었지만, 그런 술루 왕국을 끝장낸 것도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바로 영국의 주요한 상품이 바뀌게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편의 출현이었습니다.  



# 3. 교역품의 변화 : 마약거래로 전환한 제국  

19세기 중엽에 들어서, 해삼과 건어물은 여전히 중국시장에서 수요있는 상품이었지만 공급지가 다변화되고 시장에 대량으로 공급되기 시작하자, 더 이상 이전만큼 수익이 높은 상품이 되진 못했습니다. 영국만해도 인도, 호주, 남태평양에서 공급받고 있었죠.

거기에 일본 역시 훗카이도 진출을 통해 물량을 늘려나가고 있었고, 조선은 그대로 물량을 공급하고 있었으며, 청 역시도 만주-연해주의 재개발을 통해(그리고 나중에는 러시아 세력을 통해) 연해주산 해삼, 건어물까지 새로이 유입되었습니다.  

더욱이 영국의 무역수지를 위태롭게 한 것은 우습게도 중국의 면직업 확대였습니다. 전술한대로 영국은 인도산 켈리코 면직물을 수입해서 중국에 파는 것으로 약간이나마 수익을 유지해왔었죠.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서 중국 역시 남경, 송강 등의 면직업 발달로 인해 자국의 공급이 증가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인도산 면직물의 판매감소를 가져오게 됩니다. 7)

종래의 수익감소까지 벌충하기에는, 해삼과 건어물은 더 이상 매력적인 상품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거래는 유지하더라도 상황 타개를 위해 새로운 상품이 필요했으니 그것은 바로 아편이었죠.

아편은 원래 영국의 대 동남아 품목에 포함되어 있었고, 중국에도 일부 수출되고 있었으나 재배원가가 많이 들어 이익이 그렇게 남는 상품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1818년에 ‘파트나 아편’이라는 싸고 중독력은 더욱 좋은 아편 품종이 개발되게 되자, 영국의 주력 수출상품은 아편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후 중-영 관계야 다들 잘 아실테니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영국 : “마약팔게 해줘! 씨밤 쾅!”

중국 : “아, 안돼!”

영국 : “돼!” 

이렇게 세줄요약. 이제부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이제 영국에게 있어서 술루 왕국은 더 이상 파트너가 아니었습니다. 해삼과 건어물은 2등 상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굳이 술루가 아니어도 얻을 곳은 많았으니깐요. ㄱ(‘ㅅ’)r  더욱이 자기들 손에 자유무역지대도 옳겨왔으니 술루에 더 이상 지원을 해줄 이유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영국은 동남아의 또 하나의 자원에 눈독을 들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목재였습니다. 말레이반도와 북부 보르네오의 삼림은 여전히 많은 목재를 가지고 있었고 영국은 이를 손에 넣으려 했죠.8) 그러려면 보르네오에 가깝고 실제로도 보르네오 동부에 진출한 술루 왕국은 오히려 제거되어야 했죠. 



# 4. 술루 왕국의 파멸, 식민화의 전주곡

한편 장사가 예전같이 되지 않는 술루왕국은 별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농지조차도 별로 없으니 별 수 없이 하던 해적질이라도 열심히 해야죠. (….) 그러나 해적질을 하면서 술루왕국은 스페인령 필리핀, 네덜란드령 동인도, 그리고 대영제국의 어그로를 착실하게 쌓고 있었습니다. (….)

특히 19세기 중엽에는 점과 점의 네트워크에 가까웠던 식민지가, 경계선을 긋고 면을 잠식하는 ‘제국주의적 성격’으로 변모하게 되었죠. 이러한 상황은 동남아시아도 마찬가지여서,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은 각자 자신들의 세력권을 확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력권을 확정하는 군사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은, 바로 ‘문명의 이름’으로 노예제를 행하고 해적질을 하는 이들을 ‘정벌’하는 것만큼 좋은 명목이 없었죠. 



어제의 동업자 문명의 파수꾼 왈 :

“사랑과 정의 문명과 자유무역의 이름으로 너희를 벌하겠어!”



1762년에 술루 술탄 덕분에 북 보르네오에 거점을 마련했던 영국은,9) 그런 관계는 싹 잊어먹었는지(….) 북 보르네오에서의 실효적 지배와 안정된 유통망의 확보를 위해서, 북부-동부 보르네오 주변 해역에서 ‘해적’을 ‘일소’했습니다. 그리고 1881년에는 ‘해적’들을 일소한 끝에 북 보르네오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네덜란드 역시 이러한 술루 해적들 덕분에 자바의 노예를 공급받던 기억은 안드로메다로 날렸던지(….) 이러한 영국의 시도에 대응하면서 남 보르네오 수역에서 해적들을 ‘일소’했습니다. 증기함과 함포로 무장한 이들 국가의 해군을, 종래 영국의 지원까지 끓긴 술루 해적들이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죠.

하지만 영국과 네덜란드에게 얻어맞고 그로기가 된, 술루 왕국과 ‘해적’들에게 강펀치를 먹인 것은 스페인이었습니다. 1848년, 스페인은 술루제도의 중심 섬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고, 중심지 중의 하나인 발린강기 섬을 함락시켰습니다. 
 
이 시기에 수백명의 남녀노소 역시 그대로 끌려가 지하감옥에서 수년간 군만두를 먹다가, 담배농장의 노예노동자로 50여년간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 10)

생존자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다시 선단을 편성하여 해적질에 나섭니다만, 1850년대에 네덜란드는 북동 셀레베스의 메나도에 포함을 배치하고 이들을 괴멸시켜버렸죠.(…)

이렇게 제대로 박살난 술루 해적과 그들에 의존하던 술루 왕국은 더 이상 지탱할 힘이 없었습니다. 영국은 이제 더 이상 후원자가 아니었고 그들의 무서운 적이 되어있었죠. 1876년, 스페인은 나머지 술루 제도를 모두 점거하고 술루제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선언했습니다.11) 

그렇게 해삼과 건어물로 성장했던 술루 왕국은, 해삼과 건어물의 위상이 몰락하자 그렇게 함께 몰락해버렸습니다. 그들이 몰락한 자리에는 ‘문명’의 ‘통치’가 남았고, 그것은 노예제와 해적질을 근절했다는 ‘명목’으로 합리화되었습니다.

물론 그곳을 그렇게 만든 원인과 그들의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은 체 말이죠. 애시당초 그곳 사람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 아니,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라는 질문을 ‘망각’한 체, ‘문명 교화’의 이름만을 남기고 통치를 합리화 하는 것이 제국주의의 본질이었을 겁니다.

그곳에서는 노예로 일하던 피해자, 다스리던 지배자 모두가 식민제국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끌려와 사역노예가 되었던 수많은 불쌍한 인민들과 술루 왕국의 운명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죠.

그것은 해삼과 건어물을 둘러싸고, 자신들의 이야기와 역동성을 만들어나갔던 수많은 지역의 사람들, 중국인, 마카사르인, 애버리지니, 조선인 등이 20세기에 들어서 맞이할 비극적인 모습의 전주곡이기도 했습니다.


뱀다리 : 마지막에 몰아치려니 양이 많아졌군요. ㄷㄷ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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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며.

사실 저는 정작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해삼과 건어물의 역사를 탐구한 것은, 너무나도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역사상에서 일종의 ‘담론’으로 알고 있던 여러 테제들에 반하는 안티테제들도 나타나고 있죠. 

우선 생산력 중심론과 그에 따른 사회변화론과 달리, 전세계적 교역구조와 유통망의 연결에 의해 그 사회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 그런 변화(즉 상업발달과 부의 축적이라는)가 언제나 진보가 아닌 ‘역행(신분제나 노예제의 강화)’일수도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동아시아 세계의 교류사가 ‘쇄국’이라는 말로 정의하기엔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과 함께, 동남아시아인들의 해상활동과 교역네트워크는 서구인들도 당장에 파고들 수 없었고, 당장에는 거기에 편승해야할 만큼 발전한 것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런 네트워크의 한 끝자락에는 호주의 원주민 공동체가 엄연히 ‘다른 세계’로서 연결되고 있었다는 점 등을 역시 주목할 수 있겠죠.  
 
마지막으로, ‘자유’와 ‘자유무역’에서 파생된 서구인들의 발전과 진출이 정작 얼마나 많은 폭력과 노예제라는 시대착오적 제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모습과, 거기에 다시 이율배반적인 모습, 그리고 결국은 전세계를 노예로 만들어버린 제국주의에 이르기까지…

‘사소한’ 건어물들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우리가 종래에 알고 있었던 여러 역사상을 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며, 저의 부족한 필력으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이 있다면, 결국 이런 구조를 불러오고 그 가운데서 폭력이 이루어지던 것은, 결국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는 근대 사회경제의 특성과 그에 근거한 구조가 성립해 갔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근대사회를 사는 우리가, 이런 구조를 전근대인들처럼 도덕과 종교의 이름으로 절제를 요구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우리가 그런 구조를 ‘부정’할수는 없더라도, ‘소비’의 측면에서 만족하여, 지구반대편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의 측면에 관심조차 주지 않고 무심한다면, 건어물과 노예제가 얽혔던 것과 같은 ‘폭력’의 비극은 다시 발생할 것입니다.   

이에 읽어주시는 제현께옵선 이런 저의 뜻이나마 알아주시고, 이 글에서 저의 필력과 학식의 부족으로 제대로 다루지 못한 이런 ‘재고의 여지’를 고려해주실 수 있다면, 이 글이 간장병 종지로 쓰인다고 해도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겠습니다.

성원해주신 모든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 그리고 보르헤스의 이런 분류법 운운의 멘트는 캐구라로, 실제 그런 백과사전은 없는 보르헤스의 창작임 ㄳ


* 주석

주 1)  실제로 필리핀을 통치하던 스페인인들도 대 중국 시장 수출을 위해 해삼을 수집했지만, 그들은 해삼을 생물학적 분류에 입각한 9종으로 밖에 분류하지 못했던 것에 비해서, 중국상인들은 소비자의 기호와 입맛에 따라 30여가지의 분류를 해내고 있었다.


주 2) 중국의 폐쇄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들 조치는, 사실 시기적으로도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그 실제 시행도 파편적이었다. 예를 들어 명대 해금령은 절강을 중심으로 한 일본과의 교역을 금지했지만, 복건과 광동을 중심으로 한 남양교역은 유지되었고, 청대 천계령의 경우 정성공 세력과 직접적으로 대치하는 곳이 아닌 광동에 대해서는 엄밀한 시행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동시에 광동 해관으로의 일원화와 무역 제한이 실제로 영국상인들이 생각하던 것만큼 교역량을 제한하는 것이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싱가폴을 통한 중국상인과의 교역 네트워크는 이러한 제한을 상쇄시켜주었을 것이며, 조너선 스펜스 역시 아편전쟁 이후 개항장이 증가했음에도 대중국 교역량이 바로 늘어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였으니…결국 결론은 아편문제가 대세. ㄳ

    
주 3) 黃啓臣을 비롯한 중국학자들이나, 포머란츠 등의 연구는 옹정 이후 월해관으로의 일원화는 서구 상인들의 입항에 관련된 것이지, 다른 사해관(四海關)에서의 중국상인의 출항을 막은 것은 아니라는 지적을 한 바가 있었다.

1596년, 명의 천주지부는 오히려 중국상인들이 해외로 너무 많이 나가니 각 지역 상인마다 나와바리 분할을 제의했다가, 장주 측의 반발로 철회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

청 조정 역시 이들 중국상인들을 내무부(內務部)에 등재하고 이를 허가하는 방식으로 운영했으며, 대일교역 경우에 있어서는 오히려 일본측이 중국상인의 증가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었다. 밀무역까지 계산하면…..ㄷㄷ


주 4) 레플스는 각지에 부하들을 보내서 정보수집 뿐만 아니라 파괴-이간 공작을 벌이게 하는데도 선수였는데, 그의 정보원들은 해삼 및 건어물 산업의 유통형태에 대해서 몇명이서 어떠한 형태로 조업을 하는지까지를 일일히 파악하고, 이에 대한 지침과 대책건의를 ‘비밀’로까지 하면서 전달하곤 했었다.   


주 5) 하지만 이것이 다시 ‘월권행위’로 간주되고, 레플스는 본국의 의사와 반하는 조치를 취했다는 이유로 상관들의 지속적인 미움을 받았으며, 그가 죽은 후 그의 상관들은 그의 미망인에게 ‘무단으로 식민지를 개척한 비용’을 청구하려 했다니….레플스 지못미….▶◀  사실 네덜란드 정부를 우호적으로 끌어들이려던 영국 정부의 눈치 때문에, 싱가폴이 정식 식민지로 인정받은 것은 1825년이었다.   

물론 네덜란드는 힘이 없으니 레플스가 그런 짓을 해도 역시 눈치만 보고 있었다. (…..) 


주 6) 처음에는 레플스의 싱가포르 점유를 인정하지 않던 영국정부도, 시간이 지나자 영국상인들의 요구에 따라 싱가포르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판로 확대에 나서게 된다. 즉 PR선을 파견하고 홍보함으로서 현지상인과 중국, 인도상인의 해삼, 건어물 유통로를 싱가포르 등의 자국의 항로로 끌어들이려 했던 것인데, 네덜란드 역시도 역시 PR선을 파견해서 맞대응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최종적인 승자는 영국과 싱가포르가 된 듯….ㄷㄷ


주 7) 영국이 이러한 중국 면직물의 위상을 밀어내려면, 역시나 멘체스터에 유나이티드 축구팀 증기 직조기가 들어오는 날을 기다려야 했다. 


주 8) 당시의 서구의 선박건조는 아직 증기선과 범선이 혼재된 상태였고, 때문에 선박에 쓰일 동남아산 티크는 영국의 주요한 전략물자로 간주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사실 증기선과 철제 선박의시대가 된 이후에도 목재 자체도 상품성이 있었고, 실제로 이들 지역은 1930년대에 가면 세계 목재 생산의 60%를 점유하기도 했다. 나중에 이들 지역이 일본에 의해 점령되자 미국조차도 ‘잠깐’ 목재부족에 시달렸다는 것은 흑역사.    
 

주 9) 원래 술루왕국이 영국의 지원과 무역으로 워낙 막강해지다보니, 보르네오의 전통적인 패자인 브루나이 왕국은 몰락해서 역으로 술루왕국의 속국이 되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1762년경 술루 술탄은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었고(나라가 망한건 아니었뜸), 마닐라의 감옥에서 콩밥을 먹고 있었는데(….) 마침 7년 전쟁으로 스페인의 적대국이 된 영국이 마닐라를 점령하고 술루 술탄을 해방시켜주게 된다. 

이렇게 풀려난 술루술탄은 ‘감사의 표시’로 북부 보르네오를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양도했고, 이것이 영국이 북부 보르네오에 거점을 마련한 계기가 되었다.  


주 10) 1848년에 잡힌 이들은, 1905년에 미국이 필리핀 지배를 시작할때 간신히 풀려나게 된다. (50년만에…ㄷㄷ) 하지만 미국 역시 이들이 다시 해적이 될 것이라고 의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으니…이 또한 비극의 역사….ㄷㄷ

한편 스페인에 잡히지 않은 이들은 영국과 네덜란드, 스페인의 힘이 겹치는 경계지역으로 도망가 살게 되었으니, 이들의 후손이 서북 셀레베스의 사마르인들. 


주 11) 그래도 술루 술탄국 자체를 멸망시키지는 않았고, 점령상태에 둔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이렇게 잔류한 술루 술탄국은 1910년대에 미국의 필리핀 지배에 대항하는 범 필리핀 전쟁에 뛰어들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1915년에 완전히 미국에 항복하고 필리핀의 일개 행정지역으로 편입된다.


* 주요 참고문헌
 
쓰루미 요시유키, 이경덕 역,『해삼의 눈』(뿌리와 이파리, 2005)
케네스 포머란츠, 박광식 역,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심산, 2004)
오모토 케이이치, 김정환 역, 『바다의 아시아』3권 (다리미디어, 2003)
존 킹 페어뱅크 외, 김한식 외 역, 『캠브리지 중국사 : 청제국 말』1부 상권, (새물결, 2007)
구태훈,박기수, 『전통사회의 사회질서와 경제발전』(선인, 2007)
조너선 스펜스, 김희교 역, 『현대중국을 찾아서』1 (이산,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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