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긍정적 평가

즉위 직후 나라 안의 환과고독(홀아비,과부,고아,무의탁 노인) 등 혼자 살아가기 곤란한 자들을 위문하고 구제했다 숭불정책을 통해 황룡사 9층 목탑으로 상징되는 불교 문화를 융성시켰다 경주시라고 하면 떠오르는 첨성대 분황사 영묘사 등이 바로 선덕여왕 대의 작품이다 영묘사를 포함하여 여왕의 재위 15년 동안 현재 확인되는 바로만 무려 25개의 들이 신라 각지에 건설됐다

신라 중고기에 창건된 절로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와 금석문 등 여러 자료들을 통틀어서 전해지는 것들의 숫자가 대략 45개 정도니 선덕여왕 15년 동안에 지어진 사찰의 수가 그 중 절반 가까이 해당한다는 겁니다 또한 선덕여왕은 신라십성 중 하나로 추앙받는 자장율사를 후원하여 당나라유학 보내는등 불교 후원에 아낌이 없었습니다

이런 불교 후원은 왕권 강화와 대민 통제 민심 안정 내부 결속 강화 등을 위한 작업으로서 예로부터 행해진 일들의 연장이자 혼란한 시대를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진행된 일이었습니다 그런 의도가 있었음에 대해서는 하단 부정적 평가 등에서도 인정받는 경우를 어렵지않게 볼수 있습니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선덕여왕의 모습을 본딴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과 별개로 선왕 진평왕은 똑같은 모양의 목상을 당시 여성군주 스이코 덴노가 즉위한 일본으로 보냈는데 그것이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고류지 반가사유상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불교 문헌들은 전반적으로 선덕여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실제 삼국유사 등에 남은 선덕왕지기삼사를 비롯한 불교계 설화들에서 선덕여왕은 지혜롭고 신비로운 여왕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지귀 설화에서는 선덕여왕이 미녀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도 선덕여왕이 불경이나 주역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려주는 측면도 있다는 해석이 존재합니다

이런 불교의 고평가는 물론 선덕여왕이 불교의 후원자였기 때문임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지만 이것을 통해서 알수있는 사실도 있습니다 바로 선덕여왕이 (불교를 처음 수용한 법흥왕 때부터도 그랬겠지만) 불교를 통해서 왕을 신성스러운 존재로 묘사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종교를 이용해서 왕을 신성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이것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행위는 보편적인 현상이었고 선덕여왕이 줄기차게 시행한 중앙집권 노력과도 부합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재를 보는 눈이 탁월하다고 할수도 있습니다 대야성 성주인 김품석을 고려하면 이것도 그냥 저 두명(김춘추,김유신)이 유명한거 아니냐는 비판도 존재하지만 애초에 이사람들은 모두 선덕여왕이 중앙집권을 위해서 본인의 친척들을 기용한 겁니다 김품석 같은 예외도 있지만 수많은 친척들 중에 김유신,김춘추 같은 유능한 인재를 발굴해내고 이사람들한테 일을 맡겼던걸 고려하면 실제로 인재를 보는 눈이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업적은 비담의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해서 중앙집권화에 방해요소가 되던 대귀족 세력을 축소시켜서 (백제에서 의자왕이 귀족들과 갈등을 일으켜서 전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고구려가 연개소문 사후 연개소문 아들들이 권력투쟁한 것과 다르게) 신라를 하나의 통일된 명령 및 권력체계에 통합시킨 바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상당히 큰 업적인데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서 전력이 밀리던 신라가 이 둘을 상대로 버틸수 있었던건 이런 중앙집권 정책에서 기인한 바가 큽니다

사실 이 중앙집권화는 할아버지 진흥왕 때부터 이뤄진 정책으로 기존 기득권층 중앙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가야 출신들을 대거 등용시켰습니다 김유신의 어머니 신라 공주를 가야 왕족 출신과 결혼시키고 나중에 선덕여왕이 김춘추가 김유신의 누이동생과 결혼시키는 것도 그 일환입니다(능력도 없는 김품석을 대야성 성주로 임명시키는 무리수도 이 정책의 영향입니다)

선대 진평왕이 다소 무리하게 딸 선덕여왕을 후계자로 삼은것도 마찬가지 이유로 본인의 자식한테 물려줌으로써 정통성을 확보하고 중앙집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비담의 난도 이렇게 점점 밀려나는 중앙귀족들이 마지막 저항을 한걸로 이해할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중앙집권을 위해서 (대부분의 왕조가 그리했듯이) 본인의 친척들을 요직에 앉히는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입니다

이 반란을 선덕여왕 대에서 완전히 진압하고 그후로 군과 명령 체계를 통합시켰습니다 이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에게 밀려서 국력이 하락하는 와중에도 (위에서 언급한) 백제와 고구려와는 다르게 지배층의 갈등을 겪지 않았습니다 또한 외교적으로 성공을 거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가져오고 아버지 진평왕 때에 고구려의 뒤를 쳐서 땅을 넓히는등 다른 두 나라와 외교관계가 극도로 험악해져 있었다. 이 결과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신라는 상대적으로 전력집중이 쉬운 백제에게 압박을 당해서 가야 방면의 땅을 잃고 있었습니다 선덕여왕이 성을 대량으로 상실한 것도 이런 외교적 상황에서 서쪽의 백제 북쪽의 고구려 그리고 남동쪽의 왜나라(왜구)를 견제하기 위해서 전력을 분산시켜야 하는 외교상황의 연장선이었던 겁니다

실제로 선덕여왕과 싸운 의자왕 뿐만 아니라 그 이전 대인 진평왕과 백제 무왕 때부터 신라는 백제에게 밀려서 땅을 조금씩 잃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춘추를 기용해서 상대적으로 원한이 덜한 고구려와 화해하고자 했고 그 시도가 실패하자 고구려와 전쟁 중이던 동아시아 최강국 당나라와 접촉해서 동맹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 유일의 패권국이던 당나라의 위상과 당나라가 동원한 신라의 몇배에 달하는 군사들이 신라가 얼마 안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걸 고려해보면 선덕여왕은 비록 군사적으로 성을 많이 상실하긴 했지만 한강유역 등 제일 중요한 지역을 사수해내는 것은 성공했고 백제와 고구려에 점점 밀려났어도 외교적으로는 이 둘에 대해서 승리를 거뒀다고 볼수 있습니다

결론은 선덕여왕은 중앙집권된 권력을 후대에 넘겨줌으로서 김춘추와 그 아들 문무왕 때 기어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수 있게될 기반을 닦아놓았다고 평가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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