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부정적 평가

선덕왕지기삼사 같은 불교발 설화들은 비과학적인 내용을 보면 알수 있다시피 프로파간다 용비어천가일 가능성이 높으며 내용들도 개인의 총명함을 나타내는 단편적인 일화들에 불과합니다(삼국시대불교계는 왕권의 강화를 꾀하던 왕가의 후원을 받는 세력들이었고 특히 선덕여왕기의 신라 불교는 왕의 비호 아래 상당한 후원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선덕여왕의 치적을 논하는데 선덕왕지기삼사를 평가의 근거로 삼는것은 부적절합니다 도리어 지기삼사의 내용을 배제하고 보면 선덕여왕의 치세 특히 말년은 신라 최악의 내우외환의 시기 중 하나였으며 불교 후원 외에는 마땅히 업적이라고 볼만한 것도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대의 한계에 봉착했다고 해석할 여지는 있을지언정 선덕여왕을 ‘태평성대의 지혜로운 명군’으로 볼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선덕여왕의 시대 전반이 내우외환의 시대였음에는 본문 등에서도 나온바와 같이 주보돈 노태돈 서영교 이도학 등 여러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또한 본격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경우를 들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사실 전근대에는 평가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었는데 이것은 실제로 선덕여왕이 업적은 거의 전무한 반면 실책은 많이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현대 한국 학계에서도 선덕여왕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매우 압도적입니다 이는 선덕여왕의 단순히 위기를 맞이했다는 것이나 전쟁에서 거둔 성과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국가적 위기를 마주한 상황에서의 태도에 대한 평가입니다

후술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기를 마주한 상황에서 본인이 그 위기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본인 스스로 더욱 키워나갔다’는 것입니다 우선 서영교 교수의 경우 저서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2015) 등에서 선덕여왕을 혼란한 시대를 극복하는데 실패한채 본인의 현실도피를 목적으로 불사에만 치중한 암군으로 평가했습니다 다음은 저서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의 관련 내용입니다

젊었을때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그녀의 모습도 초췌한 노파가 된 당시에는 빛을 잃었다

그녀는 본인에게 닥친 현실을 현실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 쏟아부어야 할 경제력을 불사에 탕진했다

그녀는 신앙에서 고난을 견디는 힘을 빌려오고 있었고 영혼은 이미 부처님의 경이로운 극락세계에 가있었다 그녀의 정신을 담고 있는 몸도 건강하지 못했다

늘 아팠고 잔병에 걸려도 잘 낫지 않았다 즉위 오년이 되던 해 깊은 병이 들었다 어떤 의술과 기도도 효과가 없었다 황룡사에서 백좌법회를 열고 백명이 승려가 되는걸 허락했다

그녀는 4개월 만에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그녀는 부처님의 영험만이 본인을 구할수 있다고 더욱 굳게 믿었다

현재 우리가 경주시에 가면 여왕이 남겨놓은 분황사 탑과 첨성대를 보고 로망에 젖는다 하지만 그녀의 화려한 사찰과 탑은 수많은 신라인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 641년 백제 의자왕의 맹공으로 낙동강 서안의 모든 지역을 상실했다 신라는 절명의 위기에 처했지만 그녀는 거대한 황룡사 구층 목탑의 건설에 비용을 쏟아부었다 각층마다 신라가 정복할 나라의 이름을 붙였다

그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전란의 시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기는커녕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본인에게 닥친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대신 ‘공상적인 기대’로 주관적인 세계를 머리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냈다

서영교,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 중에서

선덕여왕이 저지른 군사적 실정을 비판함과 동시에 숭불정책으로 묘사되는 무리한 사찰 건설의 연속에 따른 국력의 탕진 등을 비판하는 모습입니다 선덕여왕의 숭불정책이 단순히 정치적 목적 외에도 여왕 개인의 현실도피성 정책이었음은 후술할 주보돈 교수 등도 지적하고 있으며 황룡사 구층 목탑 사업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박승범(2014)조차도 대규모 토목공사에 대한 당대인들의 희생과 불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우려는 후술하는 삼국유사에서도 감지됩니다 이런 측면은 ‘불교 문화의 발달’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명백하게 안정기는 아닌 시점에 대규모 토목공사를 반복한것은 과연 당대를 살았던 민중들에게 좋게 해석될수 있는지를 지적하는 것이다 사찰 건설을 업적이라고 해봤자 결국 대규모 토목공사고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갑니다

하물며 정치적 실패가 반복되고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이 이어지던 당시 정세에서 백성의 부담을 가중할뿐인 대규모 토목공사를 업적이라고 꼽는것은 마치 로마의 네로 황제가 ‘도무스 아우레아’를 준공한게 건축학에 도움이 됐으니 업적이라고 꼽는 수준의 어이없는 소리입니다 물론 불교계에서야 좋게 평가하겠지만

이외에도 이도학 교수 역시 정치적 실패와 무능에도 불구하고 정변 최종 승리 세력인 김춘추 세력의 사후 옹호 때문에 ‘현명한 군주’로 추앙된 지도자라고 혹평했습니다

주보돈 교수도 선덕여왕에 대해 동정하면서도 그다지 우호적인 평가는 내리지않고 암군으로 묘사했습니다 “상당히 불행한 개인사와 정치사 속에서 회피 도피의 수단으로 불교를 믿고 사찰을 지으며 침잠했다.”(역사스페셜 2009년 9월 19일 방영분 그런 난세에 현실이 어렵다고 해서 군주가 이처럼 정사에서 눈을 돌리고 종교로 현실도피하며 ‘침잠’하는 바람에 나라가 파탄난 사례중 하나가 바로 말년의 양무제로 전형적인 암군의 행보에 해당합니다)“선덕여왕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고 리더십이 없었다 오히려 나약하기 이를데 없었다.”(선덕여왕의 업적을 알려 달라”는 청중의 질문에 신라사 최고의 권위자라는 사람이 내놓은 평가가 저래서 청중은 당혹스러웠고 그날 청중의 반응은 꽤 싸늘했다고 합니다)

이희진과 은예린 등도 역시 공저 ‘그들은 어떻게 시대를 넘어 전설이 되었나'(2014) 등에서 선덕여왕에 대해 최초의 여왕이라는 수식어에 가려진 무능한 암군으로 평가했습니다 수세에 몰린채로 거듭되는 패전에 대한 비판에 더해 숭불정책에 대해서는 법흥왕 때부터 이어진 것이었으므로 새삼스럽게 의미를 가질 상황도 아니었고 특히 사찰 건설 등에 대해서는 이미 지어진 다른 시설들로도 충분히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데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쓸데없는 공사를 벌인것 ‘신라 시대판 전시행정‘으로서 무리한 불사에 대한 집착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대중 사이에서 선덕여왕이 유독 태평성대의 명군 등으로 묘사된 이유에 대해서 현대에 대두한 페미니즘 세력의 정치적 필요를 이유로 들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 ‘최초의 여왕‘이다 그러니 여자 통치자도 남자 못지않은 능력을 보였다고 하는 편이 이른바 ‘페미니즘’의 논리를 정당화시키는 데 중요한 명분이 될수 있었다 물론 ‘최초’가 아닌 여자 통치자라고 이런 이미지가 필요없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최초’가 가지는 의미와 인상은 강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덕여왕의 업적을 최대한 포장하려는 성향이 나타나게 됐다

선덕여왕에 대한 평가는 이른바 ‘페미니즘’적 필요에 의해 과대포장되는 경향이 있다 ‘여자의 권리’를 찾는거야 나무랄수 없지만 그렇다고 없는 역사를 만들어내거나 왜곡시키면서 여자 통치자의 위상을 높이려 하는 것까지 정당화하는건 곤란하다

이희진, 은예린 공저, 그들은 어떻게 시대를 넘어 전설이 되었나 중에서

특히 여왕이 대내외적으로 위기상황에 직면한 상황에서 행했다는 숭불정책이라는 것에는 이밖에도 아래와 같은 비판이 따릅니다 조원숙(2009)은 선덕여왕의 당초 의도와는 별개로 숭불정책의 결과가 부정적이었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건 건설 목적이 아니라 건설후 상황 변화일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는 황룡사 구층 목탑의 건설 배경이나 과정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뤘지만 실제 그것이 조성된 이후의 상황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된 바가 없다 당시 신라가 외침에 시달리고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일종의 토목공사를 수행하는건 많은 부작용을 낳았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즉 거듭되는 토목공사는 민심을 이반시킬수 있기 때문이다. (조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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