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 경제사 연구의 문제와 함정 – 2

쩝. 후속편을 뒤늦게 올리게 되었군요;; 몇권의 책을 더 읽고 확인한 후 리보중의 책을 중심으로 사항을 정리하려고 했는데…책 몇권이 아주 행불도서로 처리되어 대출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별수 없이 리보중의 ‘중국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모색’을 요약하는 성격이 강해질 듯 합니다. 이에 제현들께 사과의 말씀을 미리 올립니다. 부족한 점이나 틀린점, 잘못 파악한 점 등이 있다면 기탄없는 비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1. 송대 경제 발전의 기본논거 – 강남 농업혁명 – 은 기하급수적 성장규모였는가?

 송대의 경제 발전을 논하면서 가장 근본적인 전제는 바로 농업분야에서의 비약적인 발전입니다. 즉 서구의 산업혁명을 설명하는 주요 전제로서 카롤링 르네상스 하에서의 농업혁명과, 18~19세기 사포제 하에서의 농업혁명이 전제가 되듯이, 이러한 강남의 농업발전은 당시의 경제발전을 설명하는 주요한 틀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기재되는 이러한 강남의 농업 발전의 원인으로 주로 지목되는 것은,

① 우전(위전)의 개발로 인한 농지규모의 확대

② 점성도의 도입으로 인한 신품종 도입

③ 누도(樓道)의 『경직도(耕織圖)』에서 등장한 강동쟁기(江東犁 : 바퀴달린 쟁기)와 시비법과 같은 농법의 발달  

④ 집약농업으로 인한 전반적인 농업생산량의 향상  

 이러한 전제들이 당시 송대의 농업생산량의 증가를 설명하는 주요한 논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맥락 하에서 송대사 연구자들이 도출한 송대의 단위면적당 생산량은 1편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소주지역을 중심으로 했을 때 당(唐) 시기에 1무 당 1석에 지나지 않고, 명~청대에도 2석 가량에 지나지 않던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송대의 경우에는 연구자들에 따라 2.5석~6석까지 높게 책정되는 양상에 있었습니다.   

  기술발전론과 각종 자료의 평균 통계 분석을 통한 이러한 연구는 가시적으로는 반박할 수 없는 틀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세부 논리로 들어가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연구사 방법의 문제 – 선정법(選定法)과 집수법(集數法)의 문제.

 우선 ‘선정법(選定法)’이란 사료 가운데에서 사가 자신이 판단하기에 가신성이 높은 자료를 뽑아서 그를 바탕으로 당시의 전반적인 추세를 추론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송대 강남의 생산량이 타 시대에 비해 높게 나오는 연구는 대체로 이러한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선정법을 채택한 논리는 대체로 초기 교토학파의 연구자들과 치샤(漆狹), 가오스더(高斯得), 구지전(顧吉辰)의 연구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는 『송사』 식화지나, 『통지』, 『문헌통고』등의 정사류나 그에 준하는 사료의 검토를 통해, 치샤의 경우는 「영국부권농문(寧國府勸農文)」에서 소주지역의 생산량을 5~6석으로, 구지전의 경우는 『오중수리서(吳中水利書)』에서 소주의 생산량을 4석으로 언급한 부분을 중심으로, 당시의 단위면적 당 생산량에 대한 결론을 도출해 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야자키가 선택한 사례는 대체로 국가의 총론적 통계와 성향을 반영할뿐 당시 지역의 농업생산량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파악하기는 힘든 측면이 존재하고, 동시에 치샤와 구지전의 경우는 ‘정말로’ 바로 위에 언급한 사료 이외의 다른 사료를 제시하지 못한 체, 사료 하나에서 나온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즉 사료에서 제시되는 일부의 양상을 가지고 송대 강남의 전반적인 농업생산량을 가늠하는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이죠.

(선정법의 대표적인 문제점은, 1980년대 소주지역의 무 당 생산량은 송대의 단위로 환산하였을때 4~5석 가량이 되는데 이러한 선정법의 최고치. 즉 송대 강남의 1무 당 생산량이 5~6석이라는 수치를 받아들이면 비료와 기계화가 이루어진 현대의 생산량보다도 송대의 생산량이 110~150%가량 높다는 수치가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상식적인 것인지는 독자 제현의 판단에 맡깁니다.)

 이러한 ‘선정법’이 가지는 연구사적 문제점은 비교적 빨리 알려진 편이어서, 스도우 요시유키(周藤吉之), 민종티엔(閔宗殿) 등의 연구자는 ‘집수법(集數法)’을 통해 이러한 허상을 부를 수 있는 문제를 극복하고자 합니다. 집수법이란 하나의 자료를 그대로 믿지 않고 최대한의 자료를 끌어모은 다음 그 자료 중에서 최소치와 최대치 기록은 지나친 평가로 제하고, 나머지 자료 중에서 평균값을 구해 전반적인 추세를 가늠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연구방법에 의해 도출되는 송대 강남의 농업생산량은 1무 당 2~2.5석의 수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집수법은 선정법 보다는 합리적이고, 추세적 성향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집수법 역시도 그러한 분석의 대상이 되는 사료들 간의 시대적-지역적 간극이 클 경우에는 실제로 큰 수치를 도출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실제로 한때 이러한 집수법을 사용하여 초기 연구에는 송대 강남지역의 1무당 생산을 2~3석으로 잡았던 시바 요시노부(斯波義信) 역시도 후속연구에서 시대적-지역적 격차가 크지 않은 ‘추수기’ 자료인 「상숙현학전적비기(常熟縣學田籍碑記)」의 검토를 통해 소주 인근 상주의  1무 당 평균 생산량은 0.86~1.5석 사이라고 결론지은 바가 있습니다.

(이는 당시 학전은 중등급 이상의 토지였다는 점을 감안했을때, 다수의 토지의 생산량이 집수법에서 추산하는 양보다도 생산이 적었으리라는 점을 추론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통계와 수치의 검출에서 드러나는 선정법과 집수법의 문제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농지면적의 증가와 농업기술의 발전이라는 기본테제 자체가 ‘불균일한 양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3. 불균일적 발전  : 강남 델타 동부와 서부의 격차문제

 강남(강소성, 절강성, 안휘성 동부 지역)의 주요한 특색은 장강 하류에 위치한 지역이면서도 그 지형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즉 남경과 항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지역은 대체로 배수가 잘되는 완만한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고, 반면에 소주 동부의 델타지역이나 항주 동쪽의 절동(浙東)지역은 배수가 잘 안되는 델타 습지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송대 당시에 개간이 강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지라도, 그 개간의 주요한 집중지역에는 수고의 차이와 거주성의 문제 때문에 격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남송 초기까지만 해도 이러한 개간의 중심은 바로 완만한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즉 남송 시기 초까지만 해도 강남의 절반(그리고 명~청대에는 최고의 발전 지역이었던 강남 동부지역)은 미개간 상태로서 대지주 중심의 ‘조방농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미개간지의 문제는 ‘농업기술의 발전’이라는 테제도 무력화시킨다는 점에서 시사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러한 강남 동부의 습지대에 우전을 만들어 경작지를 만든다 해도….이러한 습기가 다 빠지지 않은 토지에서는 오히려 점성도는 적응을 하지 못했고, 동시에 강동쟁기와 같은 유륜쟁기는 제대로 땅을 갈지 못하여 철탑(鐵搭)과 같은 구식의 쟁기가 오히려 효과가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습기가 다 빠지지 못한 토지는 배수가 느려 이모작 절기를 맞추지 못했고, 더욱이 습지대와 경작지를 차단하고 습기가 스며들지 않게 하기 위해 논(혹은 밭)두둑을 두텁게 쌓아야 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논의 크기를 축소시켜 소로 경작하지 못하는 문제까지 존재하였습니다.    

(이러한 습지대의 경작지에서 습기가 어느 정도 빠지고 대부분의 습지가 경작된 것은 바로 명초의 일로서 실제로 이때부터 강동쟁기의 광범위한 보급과 우경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누도의 『경직도』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농법의 양상은 그가 지방관으로 재직했던 배수가 잘되는 절서(浙西)지역에서는 보편적으로 쓰였던 농법이지만, 강소성-절강성 동부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농법과는 다른 구식농법의 양상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일례로 『경직도』에서는 퇴비의 이용을 이용한 발전된 시비법을 보여주고 있지만, 강소성 동부 델타지역의 자료인 『오군지(吳郡地 : 소주)』에서는 농민들이 퇴비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홍수와 범람시에 충적토가 쌓이는 것을 비료로 사용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죠.

 결국 강남 서부의 ‘조기 개발지역’에서 나타났던 양상을, 강남 전체로 확산시켜 보는 ‘선정법적 오류’가 지역적 격차를 무시한체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강남 동부의 농업형태 즉 ‘대지주 중심의 조방농업’은 이러한 기술의 도입에 적절하지 않은 형태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조방농업 하에서 경작자보다 토지가 많은 현실에서는 굳이 집약적 생산과 기술의 발전을 시도할 추동력이 없고,

 대지주 중심의 농업 구조에서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어 안정적인 수취가 보장되는 현실에서 실패의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농법이나 품종의 도입 역시 동기가 없을 뿐더러, 그것을 도입하려는 경작자의 시도를 역으로 억제할 수도 있는 성질의 것이니깐요.

 결국 당시 송대에 강남이 개발되어 어느 정도 절대적인 생산량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개발지가 경작지로서 제 기능을 하고 안정된 생산을 이룬 것은 바로 남송시기에서야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남송의 치세 내내 강남 동부지역의 군현의 수가 증가한 것은, 화북에서 쫓겨오고 증가한 인구가 이들 미개간지로 이동하고 그에 따른 결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송대의 경제발전에서 높게 평가해야할 것은 허상으로서의 ‘농업생산량의 증가’라는 명제보다는, 이러한 남송시대에 이루어진 강남 동부 델타지역의 개간에서 ‘국가조직이 수행한 역할’일 것입니다. 비록 송의 국가조직은 토호와 대지주의 토지 겸병을 막지는 못했고 실제로도 실패하였지만, 그래도 다수의 노력을 통해 자영농과 중소지주의 양성이 가능한 기반을 후대에 남겨주었던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개간을 국가가 주도하여, 수리시설 이용권의 공공화와 규정으로의 보호, 개간비용의 보조와 개간시 소유권 보장, 지주가 함부로 전지를 확대하여 농민의 토지나 수리시설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등의 조치를 시행하였으며,  

  임안으로의 남천 이후 종래 개봉까지의 운송비로 쓰이던 지방재정분을 중앙재정분으로 돌리지 않고, 지방재정분으로 그대로 두어 이러한 개간과 수리사업에 투자할 재원으로 운용하며, 마지막으로 공전법(公田法)을 시행하여 다수의 자영농과 경작자들을 국가의 관리 하에서 보존하도록 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 하에서 강남의 개발은 개간지의 확대 뿐만이 아니라 강남의 종래 사회구조를 바꾸는 성질의 것이었으며, 이러한 사회구조적 변혁의  틈새에서 중소지주와 자영농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영세한 토지의 효율을 올리기 위해 다양한 농법과 상품작물의 재배를 시도하는 ‘조방적’이 아닌 ‘집약적’인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이는 명~청기 강남 발전의 주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며,  특히 명대의 관둔(官屯)과 그 관둔에 소속된 다수의 중소경작자들의 기반은 남송시대 공전법의 유산이라는 점은 그러한 ‘의미’를 두드러지게 하는 사례일 것입니다. 

4. 왜 이런 문제가 나타났는가?

 이런 문제를 본다면 지금까지의 송대 강남 농업혁명이라는 것은 그 발전이 있을지라도, 그 추세에는 과장이 있거나 연구사적 방법이 문제가 존재했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결론 하에서 송대의 경제 발전이라는 것은 그 추세성은 인정하더라도, 그 절대적인 규모에 있어서는 명~청대나 현대를 능가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러면 연구자들이 대중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었을까요? -_-;;

 우선 사료적인 문제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사료의 발굴과 보존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송대 강남의 발전론이라는 테제를 이끌어내던 당시(특히 1970~1980년대)에는 자료적 한계가 심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바 요시노부 역시 180개의 자료를 수집하였지만, 그 가운데서 북송시기를 대상으로 한다면 그에 해당하는 사료는 30개 정도이고 그것도 시기와 지역적 격차가 상당하였다고 후술하고 있죠.

 더욱이 중국의 경우는 1960년대 문화혁명으로 학계와 자료 자체가 초토화되고, 일본과 한국, 미국 등의 학계는 냉전으로 인해 중국 현지의 자료에 접근하는데에 제한이 있었던 문제는 이러한 성향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특히 중국 해외의 연구자들은 이미 주어진 사료와 ‘몇 줄정도의 언급’에 의존하여 당시 시대의 추세를 가늠해야하는 장벽이 존재하였습니다.

 다만 연구자들의 ‘일종의 잘못’이 있다면 자신들의 역사관에 맞추어 원하는 사료를 선정하였다는 문제도 존재할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교토학파의 성향이 그러하였지만……..그래도 그 정도는 문제가 크게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중국의 경우야말로 ‘자본주의 맹아론’의 논의가 결합하여 이러한 문제가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모택동이 ‘홍루몽 논쟁’을 제기하여 중국의 전근대에서도 이미 자본주의적 양상과 근대의 맹아가 나타나고 있었다고 본 이래, 중국은 이미 자본주의적 단계 혹은 그 맹아가 만연해 있었다는 테제가 정론화되고(그를 통하여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봉건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함으로써, 맑스적 역사발전 법칙에 부합한다는 합리화를 위해) 

그에 따라 종래의 연구사에서 이미 ‘획기적인 시기’로 보았던  ‘송대의 경제발전’은 그들의 구미에 맞는 시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관변학자들이 송대의 경제발전에 근대적 자본주의의 맹아가 있다고 보면서 이를 경쟁적으로 분석함에 따라 송대의 생산량에 대한 추계와 가설은 나날이 갈수록 그 수치가 올라가고 심지어는 현대의 생산량과 발전도를 초월하게 되는 양상이 만들어진 것이죠.   

(이제 이 논리는 막장으로 치달아서, 당대 자본주의 맹아론, 한대 자본주의 맹아론 등이 중국의 관변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을 정도입니다-_-;;)

그러나 ‘허상’은 동시에 학계나 일반인들의 통념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통념’이 되었습니다. 때문에….졸자가 자신의 성과로 공부해내고 연구한 것이 아님에도, 이런 두서없는 연구사 정리글을 쓰게 된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대사를 사랑한다면, 그 시대가 과장되서 평가받는 것 역시 ‘부당한 평가’로 보고 지적해야 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한때 ‘자본주의 맹아론’이 마치 학계의 정설로서 주장되던 한때의 우리학계를 생각하면, 우리 역사를 분석할때 이러한 송대사 연구에서 나타난 문제….즉 ‘허상이 실질을 압도하는 양상’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하지 않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 참고한 주요 자료

탁용국, 「宋代 兩浙路의 農業發展에 關한 硏究 :宋史 食貨志를 中心으로」

리보중, 『중국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모색』

김영제, 『당송재정사』 

구로다 아키노부,『화폐시스템의 세계사』

신채식, 『송대사회경제사연구』

시바 요시노부, 『宋代江南經濟史의 硏究』 (일본어 치는 법을 몰라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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