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왜 아트레우스 왕가인가?
아트레우스 왕가는 그리스 영웅 시대 최강의 왕가로서, 제우스의 후손으로 일컬어졌으며 일족이 시작되던 순간부터 멸망하는 순간까지 가문의 당주는 항상 ‘왕’ 혹은 ‘영웅’의 일생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이 왕조의 자랑스러운 창시, 그로부터 이어진 영광스러운 혈통과는 달리 왕조를 이루는 각 개인은 매우 인간적인, 아니 오히려 비도덕적이고 잔인한 성격을 지니게 됨으로써 수많은 친족 살해와 반란, 독립, 추방으로 매우 복잡한 역사를 지니게 되었는데요. 아트레우스 가문의 이야기는 그리스 영웅 신화군의 가장 중요한 축으로써 고대 그리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비극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그리스 영웅 신화를 이해하는데 아트레우스 가문의 성쇠는 매우 중요한 코드가 됩니다. 아트레우스 왕이 즉위하면서 그리스 신화상 영웅 시대가 전성기를 맞게 되고, 아트레우스 가문이 망하면서 영웅 시대가 끝나게 됩니다. 이 가문의 역사가 특히 재미있는 것은, 아트레우스 가문의 후기 역사, 그러니까 아가멤논의 트로이 전쟁부터는 신화와 역사의 경계선상에 서게 된다는 점 때문입니다. 미케네가 망하고 그리스 전역이 헤라클레이다이(이것은 자칭이고, 우리는 그들을 ‘도리스’ 민족이라고 부릅니다)의 침공으로 암흑 시대에 빠지기까지, 미케네 문명의 후기 역사에 대해, 아주 희미하게나마 실마리를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아트레우스 가문의 시작에서 멸망까지의 행적을 알아보기로 할까요.
서장. 탄탈로스와 ‘펠롭스의 저주’
프리기아의 왕이었던 탄탈로스(Τανταλοσ)는 제우스와 님프 플루토(Plouto)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프리기아의 통치권을 받습니다. 제우스는 유능한 이 아들을 꽤나 아꼈던지 자주 천상계로 불러 신들의 음식인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그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이런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점점 오만해졌고, 인간계의 다른 왕들, 또 그들의 백성들과 차별성을 부여하고 싶어하는 데에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다른 신들을 무시하며 푸대접하기까지 했습니다.
(타르타로스에서 탄탈로스가 받는 형벌)
하루는 그가 천상계로 올라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훔쳐 자신의 백성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 가지 않아 들통나게 되었고, 제우스는 아들의 치기어린 행동으로 알고 다른 신들을 설득하여 간신히 용서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탄탈로스의 오만함은 꺾이지 않아, 이번에도 아버지 제우스가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 믿고 자신을 미워하는 신들을 우롱하기 위해 자신의 장남이었던 펠롭스를 죽여 그를 국에 담아 바쳤습니다. 인륜을 무시하는 그의 이런 행동에 제우스마저 진노했습니다. 제우스는 그를 지옥으로 떨어뜨려 영원히 갈증과 허기로 괴롭게 하는 형벌을 내립니다. 이 때 마침 페르세포네를 하데스에게 빼앗겨 슬픔에 빠져있던 데메테르가 그의 오른쪽 어깨를 무심코 먹었는데, 이를 위해 신들이 펠롭스에게 상아로 어깨를 만들어 붙여주게 됩니다. 이후 아트레우스 가문의 아이들은 모두 유독 오른쪽 어깨가 하얗다고 합니다.
아트레우스 가문의 제 2대는 신들의 능력으로 다시 되살아난 펠롭스가 차지합니다. 펠롭스는 신들이 자신을 구해준 것을 항상 감사하게 여겼고, 자신의 분수를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 탄탈로스와는 달리 신들에게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탄탈로스와 마찬가지로 오만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인격적으로 결함이 많았습니다. 프리기아에서 더 살기 어렵게 된 펠롭스는 마침내 에게 해를 건너와, 피사의 왕인 오이노마오스에게 딸을 달라고 청혼하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의 피사란 도시국가 피사티스의 수도로, 올림피아 일대를 말합니다. 올림피아 신전은 피사티스의 지배하에 있었고, 국가 피사티스는 BC 572년 북쪽에 있는 엘리스(Elis)에게 점령당함으로써 종말을 맞게 됩니다. 이후 피사 마을은 도시국가 엘리스의 지배하에 있는 작은 마을로 수준이 격하됩니다.
펠롭스의 기대와는 달리, 오이노마오스는 델포이에서 ‘사위의 손에 죽게 되리라’라는 신탁을 받아, 히포다메이아에게 청혼을 해오는 족족 전차경기를 열어 구혼자를 죽이곤 했습니다. 그러나 펠롭스는 왕의 마부인 미르틸로스를 매수합니다. 미르틸로스는 왕의 수레바퀴의 축을 느슨하게 해놓아, 결국 왕은 낙마하여 사망하고 맙니다. 오이노마오스가 죽자마자, 펠롭스는 히포다메이아와 결혼하게 되었고, 그 때까지 참고 기다렸던 미르틸로스는 자신의 몫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약속했던 포상은 거부하고 오히려 미르틸로스를 바다 위 절벽에서 밀어 죽이게 됩니다. 이에 절벽에서 추락하며 미르틸로스는 죽어가며 펠롭스의 가문에 피가 그칠 날이 없을 것이라고 저주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 중 하나인, ‘펠롭스의 저주’입니다.
펠롭스와 히포다메이아 자신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습니다. 둘 사이에는 아트레우스, 티에스테스, 피테우스가 생겼고,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막내 크리시포스를 낳았습니다. 이들 중 크리시포스가 가장 잘생기고 유능한데다가, 홀로 어머니가 달랐으므로 그 반작용으로 펠롭스는 그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쏟았습니다. 이에 질투를 하게 된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가 공모하여 크리시포스를 살해합니다. 진노한 펠롭스는 두 왕자에 대한 체포령을 내립니다.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는 함께 당시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강력했던 미케네로 도망쳐 예전에 헤라클레스의 주군이기도 했던 에우리스테우스 왕에게 의탁하게 됩니다.
펠롭스의 누이동생인 니오베는 테베의 왕인 암피온과 결혼하여 7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을 두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우쭐해져서 자신이 레토 여신보다 낫다고 주장해버리는 바람에,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의 분노를 가져와 결국 두 사람의 화살에 의해 아들딸이 몰살당하는 비운을 겪습니다. 이후 그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펠롭스의 아들 중 나머지 한 명인 피테우스는 나머지 형제에 비하면 평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피사보다는 훨씬 강력했던 도시국가, 트로이젠의 공주 아이트라와 결혼하여 트로이젠의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트라는 피테우스와의 결혼 직전, 아테네의 왕인 아이게우스와 동침을 해서 이미 임신중인 상태였습니다. 그녀가 낳은 아들이 그리스 신화의 3대 영웅(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와 함께) 중 한 명인 테세우스입니다.
자, 이제부터 이야기의 본편이 시작됩니다.
1장. 피로 물든 옥좌
(에우리스테우스와 헤라클레스를 나타낸 자기)
가문으로 따지면 제 3대 당주가 되겠고, 미케네의 아트레우스 왕조의 초대 국왕이 되는, 아트레우스 일행이 의탁한 미케네의 에우리스테우스 왕(페르세우스 왕조의 제 4대, 마지막 왕이라고 합니다)에게는 후사가 없었습니다. 아트레우스를 대신으로 삼아 자신은 헤라클레스의 수많은 아들들과 전쟁을 벌이러 가고 내정을 아트레우스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에우리스테우스가 헤라클레스의 아들들을 크게 격파하고 자신도 전사하자 왕위는 그대로 아트레우스가 차지하게 됩니다. 헤라클레스의 아들들은 그리스 북방으로 쫓겨났습니다. 사실 에우리스테우스는 아트레우스의 외조카가 됩니다만, 나이 차가 그다지 많이 나지 않거나 아마 아트레우스가 더 어렸던 것 같습니다. 에우리스테우스가 죽자, 미케네인들은 다음 왕으로 누굴 세워야 할 지 신탁에 도움을 청하는데, 신탁은 ‘펠롭스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 미케네는 안정될 것이다’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미케네에 의탁하고 있는 펠롭스의 아들들은 두 명이었고, 여기서부터 아트레우스 가의 비극은 시작됩니다.
미케네에 정착했던 아트레우스는 이전부터 신들에게 반드시 자신이 가진 동물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바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신앙심을 갸륵히 여긴 헤르메스는 그에게 황금으로 된 털을 가진 양을 내려줍니다(한편, 미케네 인들이 다시 한 번 구한 신탁은 ‘황금 양털을 가진 자를 왕으로 세우라’고 지시했습니다). 아트레우스는 이 양의 털을 밀어버린 후 고기만 신들에게 바치고 황금 털은 자신이 가지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한편, 전에 형과 함께 미케네에 의탁하고 있던 티에스테스는 에우리스테우스의 후계자가 자신이 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티에스테스는 황금 양털을 빼앗으면 신들의 승인을 받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티에스테스는 황금 양털을 빼앗기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그 방법으로 왕비인 아이로페를 유혹하여 잠자리를 함께 하여 아트레우스에 대한 암살을 기도합니다. 아이로페는 티에스테스에게 황금 양털을 가져다주었고, 티에스테스는 자신이 미케네의 진정한 왕이라고 주장합니다. 티에스테스가 아트레우스에게 물었습니다.
“형님, 황금 양털을 가진 자가 분명히 미케네의 왕이 되기로 하였지요?”
“그렇다. 그리고 그 황금 양털은 내 것이다.”
“아니오. 형님, 당신은 내기에서 졌소. 황금 양털은 내가 가지고 있소.”
티에스테스가 황금 양털을 보여주자 사람들은 티에스테스가 미케네의 왕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낙담한 아트레우스에게 헤르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 당장 ‘해가 동쪽으로 진다면 왕위를 내게 돌려주겠냐’라고 제안하거라.”
“여보게 아우. 그럼, 형으로써 마지막 부탁을 하겠네. 지금 해가 질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 해가 거꾸로 진다면, 왕위를 내게 넘겨주겠나? 내게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렇게라도 부탁해보겠네.”
“형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니오? 그런 황당한 부탁을 하다니 형님답지 않구려. 하지만, 내 왕위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 뜻에서 형님의 내기를 받아들이겠소.”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정말로 태양이 거꾸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아트레우스는 자신을 모욕한 티에스테스를 미케네 밖으로 추방하는데, 티에스테스는 이 때 추방당하면서 아트레우스의 갓난 아들을 납치하여 자신이 키웁니다. 아트레우스의 아들이 커서 소년이 되자, 티에스테스는 그를 미케네 왕궁에 잠입시킵니다. 그러나 눈치 빠른 아트레우스는 암살자에 당할 만큼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암살자를 손쉽게 처치하였는데, 그 암살자의 정체는 낳자마자 납치당했던 자신의 아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아트레우스는 증오에 몸을 떨게 되었고, 티에스테스에게 가장 잔인하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고심 끝에, 그는 티에스테스에게 전령을 보내 화해하고, 미케네 왕국의 절반을 주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아트레우스는 그의 귀환을 축하하며 융숭한 연회를 열게 됩니다. 그의 앞에 이상할 정도로 푸짐한 국이 놓여졌습니다. 아트레우스는 그 국을 마심으로써 이 연회를 축하하자고 권합니다.
“형님, 이 국에는 무엇이 들어있길래 이리도 푸짐한 것입니까?”
“자네와의 화해를 위한 국일세. 자네에게만 주는 이유는 자네가 이 자리의 주인공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가장 귀한 고기를 잡아 자네에게 주는 것일세. 자네가 마시고 나면 그 국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르쳐주겠네.”
티에스테스는 이 말에 국을 허겁지겁 다 먹어버렸습니다. 그 때 아트레우스가 내뱉은 말은 굉장히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자네가 국을 먹었으니, 이제 그 국의 정체를 가르쳐주겠네. 그 국은 다름 아닌 사람으로 만든 것이지. 자네 아들들의 고기는 맛이 어땠나? 내 아들을 내 손으로 죽게 만든 심정을 느껴보란 말이네!”
티에스테스는 충격에 빠져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티에스테스의 아들 세 명이 모두 아트레우스의 손에 죽었다는 말에도 충격을 받았지만, 자신이 아들들의 고기를 먹었다는 것에 그는 미칠듯이 역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티에스테스는 분노로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이제 아트레우스를 죽이려는 목적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트레우스는 또 다른 정적의 처리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를 배신하고 티에스테스에게 황금 양털을 넘겨준 왕비 아에로페는 아트레우스의 명령으로 처형당하고 맙니다.
티에스테스는 아트레우스를 향한 증오에 고심하다가 마침내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게 됩니다.
“티에스테스, 너와 네 딸인 펠로피아 사이에서 낳은 아들만이 아트레우스를 죽일 수 있다.”
그는 존속 살인을 유도했기 때문에 모든 신들에게 버림받았던 것인지, 신탁마저도 잔인했습니다. 그러나 아트레우스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방법이라도 상관 없었던 그의 눈에는 이제 인륜이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인 펠로피아의 방에 잠입하여 그녀를 겁탈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때 펠로피아는 자신을 겁탈한 자가 누군지 알아두기 위하여 그의 허리춤으로부터 검을 훔쳐놓았습니다. 티에스테스는 곧 어둠을 틈타 사라지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운명의 장난이랄까, 거리를 행차하던 아트레우스는 펠로피아를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버렸습니다. 펠로피아는 티에스테스의 딸임을 숨긴 채, 아트레우스의 측실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윽고 펠로피아가 아들을 낳자 아트레우스는 그를 정성스럽게 기르게 되고, 아이기스토스라는 이름까지 지어주게 됩니다. 펠로피아는 티에스테스로부터 훔쳐두었던 검을 아들인 아이기스토스에게 물려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