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열도의 주민 (4) 아이누

일본열도의 주민 3편

1. 일본·일본인

2. 토착 주민

   -서남 지역의 섬들

   -쿠마소, 하야토, 에미시

   -아이누

3. 류큐 열도의 주민

4. 재일 조선인·한국인

5. 일본상

→아이누

북방에서는 영역의 확대와 함께 에미시와의 접촉이 계속되었고, 동화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일본인(和人)에 편입시키는 한편, 동화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을 에미시라고 부르며 구별했다.

막번 체제하에서는 최북단에 위치한 마츠마에(松前) 번이 에미시와의 교섭 창구가 되어 지배권을 넓혀 갔고, 그로 인해 에미시는 이전보다 일본인으로부터 훨씬 더 강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에미시와의 교역에 대해서도 통제가 이루어져, 지역별로 특정 상인들에게 위탁하는 정책이 취해졌다. 에미시와의 교역을 통해 모피 등과 시베리아의 산물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마츠마에 번의 관리나 교역 일을 하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이누의 문물이나 아이누의 모습을 그린 그림 등을 통해 본토의 일부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아이누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후 막부 말기 시기가 되면, 남하의 움직임을 보이던 러시아에 대항하여 북방의 영토 방위라는 관점에서 훗카이도와 아이누에 대한 관심이 전례없이 높아졌다. 즉, 주권국가에 의한 새로운 국제 질서가 현실감을 띠게 된 가운데, 국경 및 국민을 책정한다는 맥락에서도 국가적인 관심사로 에미시 선주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훗카이도의 선주민에 대하여 법적으로 ‘토인(土人)’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일본인과 대등하다고도 할 수 있는 ‘에미시’라는 용어를 피하고 선주민의 역사성과 고유성을 부정하는 한편, 이들을 열도의 주민들에 비하여 주변적인 지위에 두고 지배하려는 자세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고유의 역사성과 문화 전통을 소유하고 있는 타자로 보았지만, 이렇게 편입되고 나서부터는 에미시 혹은 아이누라는 독자적인 존재가 공식적으로는 언급되지 않게 되었다.

메이지 이후 훗카이도에 대한 적극적인 식민정책으로 선주민인 아이누와 식민자와의 대립이 더욱 심각해졌고, 아이누는 인종적·민족적 차별과 함께 국가의 법체계 안에서도 법적 차별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특히 거주 구역에 대한 법적인 개입 때문에, 재래의 생활 기반이었던 생업 활동이 현저하게 손상을 입게 되었다. 한편 문화적으로도 일본인으로의 동화정책이 추진되어 아이누의 사회·문화적 전통이 부정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아이누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노인들 사이에서도 그 수가 현격하게 줄어들었고, 아이누계 주민의 일상생활에 나타나던 민족문화의 특질도 거의 잃어버렸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아이누의 전통문화에 대한 이미지는, 대부분이 관광 상품으로 다시 만들어지고 전시된 아이누의 주거나 민족 예능, 목각 등의 공예품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아이누라는 정체성의 측면에서도 주민들 사이에서조차 상당한 인식의 차가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는 언어, 신화나 구비 전승의 문예, 신앙과 의례 등을 근거로 하여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도 있고, 또한 아이누어의 부활과 언어교육 운동을 비롯하여 아이누 문화 복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그 한편에서는 오랜 기간 차별과 동화정책에 의해 아이누라는 정체성이 부정되는 가운데, 민족적 정체성을 스스로 포기하기에 이른 사람도 적지 않은 게 분명하다. 

무대에서 연주되고 있는 아이누의 무용.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아칸(阿寒)호 아이누 시어터 공연.

그리나 최근에는 마침내 일본에서도 언어 등 이른바 객관적인 민족문화의 지표뿐만 아니라 주체적인 의식으로서의 정체성이 존중받게 되었고, 민족문화를 상실했다고 여겨졌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도 여러 각도에서 민족 정체성을 모색하는 시도가 확산되고 있다. 북미 인디언을 비롯한 선주민족과의 국제적인 교류와 지원 활동, 법적인 권리의 회복을 지향하는 운동도 전개되고 있으며, 종래와 같은 일본이라는 특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맥락도 고려한 새로운 정체성이 자각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북쪽 땅에 선주민으로서의 에미시 혹은 아이누가 존재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적인 견해로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상한 사태는 어떻게 하여 생겨난 것일까? 국민이라는 지위 이외에는 선주민이라든가 민족 등의 지위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후주민 혹은 다수 민족 측의 논리였는데, 국민이라는 지위는 그만큼 공평하게 보장되었던 것일까? 적어도 그때까지의 일본에서는 분명히 선주민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 게 틀림없다. 국민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사람들의 인식을 조작함으로써 새로운 통념을 보급시키고 그에 걸맞는 정책이 전개되었던 바, 그것이 마치 근대적인 국가의 합의라는 형식을 취해 추진된 것이다. 

패전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일본 정부는 국제회의 등에서 일본에는 소수민족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말을 태연하게 내뱉고 있는데, 이는 결국 일본이라는 국가가 인권에 대한 인식이 열등함을 보여주는 결과가 되었다. 국민의 통념을 충분히 고려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이런 결과를 볼 때, 국가나 행정이 국민에게 역기능을 초래하는 일은 어느 세상에서나 되풀이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민족이라는 의식이나 그 정체성은 항상 사람들이 처한 상황하에서 외부인들로부터 규정됨과 동시에, 사람들의 주체적인 인식고 행동을 통해 재구성되는 사회적 과정이다. 민족과 관련된 담론은 그 다양한 주체와 그것이 처한 맥락으로부터 분리시키게 되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해가 뒤얽힌 복잡한 사회 상황하에서는, 항상 정치성을 띤 유동적이고 중층적인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의식이나 관념으로서 조작되고 연출된 일면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구체적인 실천이나 표상에 의해 여러 가지로 실체화가 시도되는 것이기도 하다. 민족이란 이와 같은 사회·문화적인 과정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따라서 법적 제도에 따른 행정으로는 애당초 길들여질 수 없는 딜레마를 자각해야 할 것이다.

-이토 아비토(2009), 『일본 사회 일본 문화: 동경대 특별 강좌』. 소와당-

일본 서브컬쳐계에서 유명한 에미시·아이누계 캐릭터라면 바로 ‘이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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