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열도의 주민 (5) 류큐 열도의 주민

일본열도의 주민 4편

1. 일본·일본인

2. 토착 주민

3. 류큐 열도의 주민

   -섬사람들의 정체성

   -오키나와의 종족성(ethnicity)

   -오키나와 음악

4. 재일 조선인·한국인

5. 일본상

옛 류큐(유구) 왕국의 모습

3. 류큐 열도의 주민

열도의 서남부에 있는 류큐(琉球)의 존재가 역사의 무대에 떠오른 것은 쿠마소나 에미시 등과 비교할 때 훨씬 후대의 일이다. 류큐에서는 14세기에 들어 중산(中山)을 비롯하여 북산(北山), 남산(南山)의 세 왕조가 성립되었고, 14세기 후반에는 중국을 통일한 명나라의 요구에 따라 책봉을 받고 조공을 시작하였다. 

이들 왕조 중에서도 15세기 초엽에 삼산을 통일하여 류큐의 통일 왕조가 된 중산 왕조는, 그 후 1866년의 마지막 책봉까지 약 500년에 걸쳐 중국과 책봉 체제를 유지해왔다는 점에서 일본의 왕조와는 크게 다르다. 중산 왕조는 통일 왕조의 체제를 굳힘과 동시에 중국에 대한 조공을 비롯하여 일본, 조선 및 동남아시아 각 지역과 해상 교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으며, 또한 언어나 생활문화의 측면에서도 당시의 시마즈(島津) 번이나 큐슈 지방과는 이질적인 토착 문화 전통에 입각한 독자적인 왕조 국가를 형성하였다.

17세기 초, 가고시마의 시마즈 번이 류큐에 군사를 보내어 이곳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류큐는 일본 국내 제도상 간접적으로 막번 체제에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북방의 에미시를 마츠마에 번이 지배하게 되는 것과 거의 같은 시기였다. 그러한 류큐 왕구근 다른 한편으로 청나라와 책봉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고, 또한 막부 측에서도 그 사절을 류큐 국 사절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아, 일본의 영향하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일본과는 별개의 왕국으로 간주되었다.

서남 제도에서는 이웃나라인 청나라와의 책봉 관계로부터, 주권 국가에 의한 배타적 영토 지배를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류큐를 일본국의 지방행정 안에 정식으로 편입시키려는 일련의 정책(류큐 처분)이 전개되었다. 

우선 메이지유신 후의 폐번치현(1871년)이 실시된 이듬해인 1872년에는 일단 류큐 번의 설치를 선언하고 류큐 국왕을 류큐 번왕으로 봉한다는 조치가 취해졌고, 그 다음 1875년에는 류큐에서 왕국 제도의 해체 및 청나라와의 책봉·조공 관계의 폐지를 강요하더니, 이윽고 1879년에는 류큐 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는 폐번치현을 단행하였다. 즉, 제도상으로는 일단 중국과의 책봉 관계에 대항하는 조치를 취하고, 류큐가 중국과 일본 양방에 모두 종속되는 상황을 정리한 다음, 이를 병합하는 방침이 채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에는 오키나와에 대하여 학교교육을 매개로 하는 동화정책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독자적인 문화전통은 오늘날 다시금 오키나와 사람들의 정체성의 근거가 되고 있다.

역사학에서 류큐사는 일본사 혹은 국가 중에서도 주변사로 평가되고, 또한 동양사 안에서도 주변적인 평가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류큐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는 오키나와 이외에는 별로 많지 않고, 교육이나 연구 지도도 오키나와 이외의 지역에서는 충분한 체제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키나와의 학교교육에서는 일본사나 세계사(동양사)와는 별도로 류큐·오키나와사가 필요하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본토 편입 후 오키나와에서는 류큐 왕조사 연구나 구스쿠(城) 등의 고고학적 발굴 조사와 병행하여 사적의 정비 사업이 추진되었다. 전쟁으로 철저하게 파괴된 수리성(首里王城) 성곽과 왕궁도, 최근 들어 지역주민 운동에 힘입어 복원되고 있다. 서미트(정상회담)가 개최되었을 때 환영 연회 장소가 되기도 했던 수리성은, 과거에 일본열도 남단의 류큐에 독자적인 문화와 교역활동으로 유지되었던 또 하나의 왕국이 존재하였다는 역사와, 일본 문화의 다원성을 인식하는 데서도 그 존재의 의미는 큰 것이다.

오키나와 민중의 신앙 대상이었던 우타키(御嶽).  

류큐 왕국이 제정한 류큐 신앙 성소의 총칭으로, 그 이전에는 다양한 호칭이 각 지방에 있었다. 이 호칭은 주로 오키나와 주변 섬에서 사용하였다. 우타키는 류큐 신화의 신이 존재하거나 방문하는 장소이며, 또한 조상 신을 모시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역 제사에서는 주요 시설이며, 지역을 수호하는 성소이다. 류큐의 신앙은 신을 섬기는 것은 여성만이 가능하므로 왕국 시대는 완전히 남자는 금지였다. 지금도 특정 지역에서는 남자의 입장을 허용하지 않는다.

-설명은 위키백과 참조-

이상과 같이 열도의 주민들은 차례차례 야마토의 단독 왕조 지배하에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여러 가지 사회제도나 매체를 통해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 하는 과제도 생겨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라 외부에 위치한 북쪽과 남쪽 변경 지방의 토착 민족사회를 중앙의 지배하에 편입시킴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중앙 또한 스스로의 단일성을 상실하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새롭게 편입된 주변의 제 집단들에 대해서는, 천황제 아래 신민으로 귀순할 것을 종용하는 데에서도 국민의 일체성이 특히 강조되었다. 또한 국토와 주민 의식의 일치를 도모함으로써 국민국가 건설을 추구하였던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으로서는, 공식적으로는 아이누 및 류큐의 민족적 정체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본의 주변부에 독자적인 전통을 보유한 에미시와 류큐가 존재하였다는 것은, 에도 시대의 서민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인식되고 있었으며, 메이지 시기에 들어서서도 일본 영토 내에 이질적인 민족이 존재한다는 것은 상식이었고,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타민족 체험과도 병행하여, 국내(일본교수가 쓴 서적이라, 여기서 말하는 ‘국내’는 일본을 뜻함. 역자주)에서도 공식적으로는 국민의 일체성이 강조되었고, 실재로서의 이질성과 국가 이념으로서의 일체성이 모순되는 이중적인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토 아비토(2009), 『일본 사회 일본 문화: 동경대 특별 강좌』. 소와당-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