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해군의 정확한 거리측정 탓에 영국은 전투 초반부터 여러 척의 군함을 잃었다. 순양전함 HMS 퀸 매리는 오후 4시 즈음 격침됐는데, 이를 HMS 섀논에 타고 있던 아서 크라운이 목격했다.
“포성에 포성이 이어지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안개가 너무도 자욱해서 갑판 위에서도 실제 함선들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끔찍할 정도로 많은 양의 연기와 화염이 상공으로 치솟는 것을 목격했다. 이후 그것이 걷혔을 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곧 난 깨달았고, 또 공표되었다. 퀸 매리가 당한 것이었다. 폭발과 함께 모두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 광경은 내게 가장 소름끼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아주, 아주 치명적인 곳을 맞은게 분명했다. 나중에 우리들은 서로 대화를 나눴다. 우린 아군보다 독일인들이 철갑탄을 더 전문적으로 다루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투의 전면에 노출된 HMS 체스터에게는 질릴 정도의 포화가 쏟아졌다. 선임화부 버트 스티븐스는 그녀의 승조원 중 한명이었다.
“작전 도중 좌현 바로 앞에서 발포가 있었고, 인빈시블의 후드 제독은 우리 함장에게 그곳으로 가서 무슨 일인지 조사해볼 것을 명령했다. 우린 지시에 따라 안개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가 해당 위치에 도착했을 때, 거기엔 5척의 독일 군함이 있었다. 당연히 놈들과 할 건 하나밖에 없었다. 우린 1척에 어뢰를 맞출 수 있었고 나머지 4척과 전투를 벌였다. 그들은 우리를 지독하게 두들겨팼다. 모든 함포 요원들이 죽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 그와중에도 함수 함포 요원이었던 재키 콘웰이 서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는 이후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았다; 함교는 무너졌다. 맨 앞의 굴뚝도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그녀의 측면은 포화에 뚫린 구멍으로 너덜너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이 입은 손실에 HMS 인빈시블도 추가됐다. 그녀는 3 순양전함 전대의 기함이었다. HMS 아이언 듀크에 복무중이던 레지날드 애슬리가 그녀의 침몰을 지켜봤다.
“당시 내 전투배치 위치는 앞돛대 망루였다. 곧 날아드는 포탄들이 보였지만 독일 함대는 보이지가 않았다. 그때의 우린 이런 식의 거리측정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었다. (this range-finding business we knew nothing about then.) 이 포탄들이 인빈시블과 인도미터블을 맞췄다. 그러더니 인빈시블이 침몰했다. 오 맙소사. 더이상 이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인빈시블은 뒤집히더니 그녀에 매달려 있던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가라앉았다. 그러더니 이번엔 잠수함이 쏜 어뢰들이 각 함선에게 다가오면서 발생하는 파도들이 보였다.(Then you could see the wakes of the torpedoes from the submarines coming toward each ship.)”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인빈시블과 함께 가라앉았다. 병기장교 휴버트 댄레우터(Hubert Dannreuther)는 얼마 안 돼는 생존자 중 하나였다.
“그녀는 산산히 무너지며 침몰했고 난 밀려나 다시금 수면으로 떠올랐다(거의 숨막혀 죽을 뻔 했지만). 주변에 사격연습용 부이(target flating)가 하나 있길래 그리로 가 아래로 들어갔더니, 거기 생존자 2명이 더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배저(HMS Badger)가 옆으로 오더니 우릴 건져올렸다.”
영국 해군은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나쁜 시계로 인해 계속해서 골탕을 먹었다. 여기에 대해 HMS 허큘리스에 승선 중이던 장교후보생 본햄 파운스(Bonham Faunce)가 증언한다.
“난 함장과 그가 병기장교에게 전하는 말, 즉 12인치 포를 향하게 할 방향과 조만간 독일 군함 몇척 정도는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지시사항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때의 시계는 매우 불량했다. 사방이 흐릿했다. 안개가 껴있었고, 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도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하지만 마침내 병기장교와 보조 관측장교(assistant spotting officer)가 ‘그들이 저기 있다’ 혹은 비슷한 의미를 담은 발견보고를 외치는 것이 들렸다. 즉시 난 머리를 치켜들었고, 안개 너머 흐릿하지만 분명 엄청나게 거대한 함선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배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안개 낀 하늘은 에드가 뤼팅을 비롯한 독일 함대에게도 악재로 작용하고 있었다.
“바다는 잔잔했고 날씨도 특히 처음 한 두시간은 꽤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점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여기에 함선들이 배출하는 연기와 포연도 더해져 시야를 거의 100% 수준으로 흐려놨다. 이는 우리가 아군 함선들로부터 1,000에서 2,000 미터만 떨어져 있어도 더이상 서로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번은 이 때문에 거의 재난으로 끝날 뻔 한 곤란한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가 영국 군함에게 어뢰공격을 가할 때의 일이었다. 우린 아군 대열을 뚫고 뛰쳐나가 영국 전열에 최대한 접근한 다음 어뢰를 발사하고자 했다. 하지만 영국 전열이 반전해버렸고, 그탓에 어뢰공격이 가능한 위치까지 우리가 놈들을 따라잡아 자리잡을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우리도 반전해 아군 함선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연기와 구름은 있었다. 하지만 독일 함선은 한 척도 없었다.”
불량한 시계는 이미 혼란스러운 조우를 경험 중이던 양 함대의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했다. HMS 문스터의 하사관 윌리엄 파슨이 혼돈에 빠진 전투를 묘사했다.
“그때 상황은 거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는가? 그러니까 너무 많은 일들이 한번에 벌어지는 통에, 무언가에 대해,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해서도 제대로 생각해볼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여기선 함선 한척이 포격을 얻어맞고 있다. 넌 ‘불쌍한 새끼들, 불쌍한 놈들’이라고 읊조린다. 그와 동시에 옆을 보면 동료 두어명이 서있다. 하지만 니가 이들에 대해 미처 생각해보기도 전에 이번엔 저쪽에서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진다. 너무도 많은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전체 전략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지도 못한다. 넌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는다. 물론 꽤 쉽게 견딜 수 있었다. 두려움이나 그 비슷한 감정은 전혀 없었다. 연민은, 아마도 있었겠지만 바로 그 순간 또다른 사건들이 수없이 터져버리는 바람에… 그에 길게 신경쓸 시간조차 없었다.”
영국해군의 두 주요 지휘관들이었던 비티와 젤리코.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의사소통 부족은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영국해군의 효율성을 심각하게 저해시켰다. 윌리엄 피곳은 젤리코의 기함 HMS 아이언 듀크의 무선통신병이었다.
“그동안 비티는 30마일 정도 앞서가면서 그가 어디 있는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실상 완전한 방치였다. 그 어떤 도서나 상식과 비교해 봐도, 그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젠 우리 쪽에서 그에게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함대는 어디인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딘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우린 긴급히 통신을 작성하고 암호화한 다음 전투 함대에게 전송했지만, 거기에 대한 응답은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수적 열세에 몰렸다는 사실을 깨닫자, 셰어 제독은 휘하 함대에게 반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비록 그 격렬함의 정도가 사그러들긴 했지만, 전투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조지 웨인포드가 HMS 온슬로트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평가했다.
“대략 저녁 6시에서 7시 이후, 상황이 완화되었다. 사방이 잔해들이었다. 엄청나게 많았다. 온슬로트는 우리에게 환호를 보내는 아군들로 빼곡한 해군 뗏목 비슷한 것 하나를 지나쳤다. 그러나 우린 멈춰서 그들을 건져주지 않았다. 우리에겐 다른 할 일이 있었고 독일 잠수함들이 근처에 우글거린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밖에도 전투해역에서 둥둥 떠다니던 죽은 물고기떼에 대한 기억이 언제나 생생하다. 내 생각엔 배들이 폭발할 때 발생한 충격파에 뇌진탕을 일으킨게 아닐까 하는데, 사방에서 수없이 많은 물고기들이 죽은 채 떠다니고 있었다.”
영국 함대에서 발생한 손실은 상당했다. J 헤이즐우드는 그의 전함, HMS 워스파이트의 상태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전투 도중 조타장치가 끼어 움직이지 않았을 때 집중포화를 얻어맞았다.
“난 해치에서 나와 포탑 꼭대기로 올라갔다. 거기서 바라본 광경은 몹시 놀라웠다. 함교에선 구명대를 보관하던 구역이 불타고 있었다. 6인치 포대의 코르다이트에도 불이 붙어 화염이 맹렬했다. 상갑판은 포탄으로 벌집이 되어 있었고, 그 어떤 단정도 제대로 물에 띄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거기에서 난 함장실로 내려갔고 눈앞에 펼쳐진 수라장에 경악했다. 문앞에서 함장의 훈장들을 주울 수 있었는데, 원래는 옆의 찬장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이었다. 한편 함미 구역에선, 격실 내에 해수가 2~3피트 깊이로 차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측이 큰 인명손실을 입은 것은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아서 가스킨은 HMS 말라야가 입은 승조원 손실을 피부로 느꼈다.
“그땐 죽음 그 자체가 공기 중에 가득한 것만 같았다. 우리 배는 75명을 잃었다. 일부는 인버고든으로 돌아가던 도중 바다에 묻었다. 내 친구들도 떠나갔다. 모두가 갑판 위에 놓여 있는 광경을 보았을 때 그 사실이 너무도 뼈저리게 다가왔다. 난 대략 ‘오 세상에, 맙소사. 내 인생에서 절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야.’ 같은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밤이 되자 전투의 양상은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된 일련의 격렬한 소규모 교전들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영국은 장교 존 오버리(John Ouvry)가 설명하는 것처럼 야간전투에 각잡고 돌입하는 것을 망설였고, 덕분에 어둠의 보호를 받은 독일 함대는 해역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황혼 중에 여러차례 배 한척이 시야에 들어왔고, 우린 놈에게 두차례 포격을 가했다. 그리고 그게 뭐였던간에 그녀 또한 반격했다. (내 생각엔 아마 독일 순양전함이 아닐까 싶다.) 비록 맞지는 않았지만, 어스름 도중 거의 영거리에서 포염을 관측하고는 어떤 일이든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이런 일은 굉장히 불쾌한 경험이었다. 그뒤엔 물론 양쪽 모두 이탈했다. 왜냐하면 어둠 속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건 너무 위험한 도박이기 때문이다. 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절대로 예상할 수가 없다. 따라서 언제가 됐든 밤에는 작전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만약 네가 영거리에서 적 함선을 발견했는데 그놈이 탐조등을 먼저 켜고 현측까지 먼저 들이댄다면, 넌 그것으로 끝나는 거다. 따라서 영국해군에게 야간작전은 전혀 권장되는 행동이 아니었고, 그것이 내가 알던 것이었다.”
유틀란트 전투에서 누가 승리했는지는 명백히 가려낼 수가 없다. 두 함대 모두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 알프레드 레가트(Alfred Leggat)는 이 커다란 기대를 모았던 ‘함대결전’ 이후 영국이 느꼈던 실망감을 다음과 같이 압축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탄스러운 일이었다. 그 전투는 절대 승리가 아니었다. 우린 독일 해군이 잃은 것과 거의 비슷한 수의 함선을 잃었고 인명손실은 훨씬 많이 당했다. 물론 보통 말하듯이 독일 대양함대가 이후 다시는 바다로 나오지 못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트라팔가르나, 이후 마타판에서 얻은 것과 같은 승리가 아니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서 크라운은 전투의 결과에 대해 더 냉철하게 접근했다. 그는 유틀란트 전투 이후, 독일이 대함대의 북해 제해권에 대해 다시는 진지하게 도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난 비록 늙었지만 한때 해군에 몸담았던 일원으로써, 사람들이 떠들곤 하는 ‘우리가 잘 하지 못했다’는 평가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겠다. 놈들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이 사실이 우리가 일을 잘해냈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린 더이상 놈들을 잡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었다. 비록 놈들을 꾀어내려고 그때 그 해안선과 가까운 해역으로 자주 출격하곤 했지만, (물론 대함대가 언제나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를 제때 구해줄 수 있을 정도로 가깝지 않을 수도 있었다) 쥐들은 결코 치즈조각을 쫓아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가 유틀란트 전투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유틀란트는 영국과 왕립해군의 전략적 승리였다. 하지만 레지날드 애슬리에게 있어 이 전투의 핵심은 승리한 들이 아닌, 스러진 이들이다.
“스캐퍼 플로로 돌아가던 중 나에게 큰 인상을 준 것이, 전투가 시작된 해역에 도착했을 때 함대 전체가 속도를 늦추거나 아예 멈춰선 다음, 그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추도식을 벌이던 광경이었다. 그건 내 마음속 깊이 뚜렷이 각인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