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기생문화 上

태화관 1관에서 그림을 연습중인 기생들

1913년부터 1919년 3.1운동 이후까지 회관 것을 중앙일보에 실은 글입니다. 그때 당시 기생의 풍속및 일상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의친왕과의 일화나 다른 이야기가 많지만 줄여서 상,하두편으로 기재하고자 합니다.내용은 필요한부분만 간추렸습니다. (중략)표시가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1970년 12월 26일- 유년시절(원문에서는 ‘순종앞의 진연’)
나는 평양에서 1남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주 어릴 때는 아버님이 좌수였기 때문에 집안 살림이 넉넉했으나 아버님께서 물 산 객주 업을 하시다 실패함으로써 집안이 기울었고, 오빠와 언니들이 모두 결혼한 다음 어머님께서는 나를 의지해 살기 위해 12살인 나를 기생 양성소라고 볼 수 있는 평양의 이름난 노래 서재에 보냈다. 이것이 내가 기생으로서 첫발을 디디게 된 동기였다. 이때 평양에서는 여염집에서 딸을 기생으로 만드는 것이 그렇게 큰 허물이 되지는 않았지만, 좋은 일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내가 노래 서재에 다니기 시작 한지 13일이 지났을 때였다. 동네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내가 노래 서재에 나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아버지와 오빠는 크게 노하시어 나를 불러다 꿇어앉히고 야단이시었다. 그러나 이미 13일 동안이나마 기적에 올라진 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문에 발을 드리운 채 일평생 나를 면대해 주지 않으셨다.내가 노래 서재에 나가던 첫날 청 맹 관인 여선생은 처음 보는 나의 손을 잡고『경 소 용』이라고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아마 그 말은『서울에서 쓸모 있는 몸』이란 뜻으로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그후 나는 서울에 와서 풍파를 용케 이겨 말년을 가정에서 유복하게 지내게 되니 이 선생님의 말씀이 들어맞았다는 생각이 든다.이때 평양에는 내가 다닌 노래 서재 외에 남자 선생이 가르치는 노래 서재도 한곳이 있었다. 두 곳 모두 배우는 여자아이들이 40∼50명 정도 있다. 나는 이곳에서 1년 남짓 우 조·계면·가사·시조 등을 배우다가 어머님 말씀에 따라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중략)며칠 후 우리 일행은 천일 마로 이름난 송병준 백작 집을 향해 인력거를 타고 가다가 진고개 근방에서 갑자기 머리를 숙이라는 소리를 듣고 놀랐다.얼떨결에 나는 처음으로 임금님의 행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송 백작 집 응접실에 점잖게 앉아 있던 우리는 송씨 집 하인이 벽에 불은 단추 하나를 누르자 갑자기 환해지는 바람에 처음 보는 전깃불에 기겁을 했고 같이 갔던 체 홍은 의자에서 마루 바닥에 떨어지는 정도였다.(중략)첫 연회석에 나가는 기분은 설 레이기만 했다. 나는 바른 손을 왼쪽 겨드랑이에 대고 왼손을 땅에 짚고 앉으면서『안녕 합쇼』하고 길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앉았다. 이날 송 백작 집 연석에서 나는 그 동안 다듬은 노래와 춤을 보여줬고 끝났을 때 송 백작이 수고했다면서 과자 상자를 주었다. 나는 송 백작에게『고맙습니다』고 했는데 주 선배는『황송합니다』 로 해야 한다고 일러줘 조그마한 실수를 기록했다. 진 연 소식이 캄캄한 채 우리는 다 동에 있는 큰 기와집(이 집도 송병준의 소유였다) 에 옮겨 기생조합 권 번 등에 소속하면서 정악전습 소에 나가 노래와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정악전습 소는 지금 중앙청 앞 정부 종합청사 자리에 있었다. 그 때에는 낮은 기와집들이 경복궁 앞에 즐비하게 늘어 있어 거리가 어둠침침했지만 나는 요즘 고층 건물로 밝아진 이 길을 걸을 때마다 파란 고비를 용케도 넘겼다고 회상해 보곤 한다.그럭저럭 한해를 넘겼을 때 진 연이 곧 열린다는 소식이 다시 전해져 나는 봉 상시에 나가 정자 춤, 선유가 등 진 연 준비에 열중했다. 이때 나라에서 화관 몽두리와 연두색 치마 저고리 등 의복 일습을 우리에게 내려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이처럼 맹연습을 3개월 동안 했으나 진연으로 순종이 옛일을 다시 되새길 것을 두려워한 왜놈들의 반대로 중지되었다.그러나 요행히 다음해 간소한 진연이 열리게 됐다.그곳에는 남도의 춘향가 일파만 부른다는 바람에서도 일파는 크게 실망했지만 적극적인 교섭을 벌인 결과 우리서도 기생 11명은 남자 복장을 입고 아전 역할을 하는 일에 참석하기로 되었다. 나는 관사 쪽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그들이 노상 부르는『쉬-』『아뢰오』소리를 흉내내면서 있노라니 머리와 다리가 아팠다. 용 강을 바라보려고 머리를 들면 어디선가 『쉬』소리가 들려 왔으나 머리를 살풋이 들고 상감을 훔쳐봤다. 순종은 옥 두루마기에 여송연을 들고 용상에 앉아 있었는데 우리들의 눈에도 한없이 가엽게 보였다. [출처: 중앙일보] (42)<제자는 필자>|<제4화>명월관|이난향> 평양에서는 기생이 되는것이 큰 허물은 아니었지만 좋은일은 아니었음 1900년대에는 서재에서 여자아이들이 “가곡”을 배움 어전에 나가서 13살에 처음 한량무로 참석하였고 이때 연회에는 남도기생이 중심이 되었음(이때 당시는 1913년으로 고종과 순종이 모두 살아있었으며 13살에 처음으로 기적에 올랐습니다. 연회가 열린다고 애시당초 계획되었던 연도가 13년이고 실제 참여는 14년으로 생각됩니다.)

-1971년 1월 5일-기생조합
1909년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기생들이 서울로 몰려들어 요리집들은 매일밤 성시를 이루어 장사 잘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여기에도 골치아픈 일이 차차 생겨나기 시작했다.찾아온 손님이 부르고 싶은 기생의 이름을 대면 일일이 연락해서 불러와야 했고 한 기생을 놓고 신분의 고하가 있는 몇사람이 서로 불러오라고 으르렁대는 경우가 생기는가 하면, 불려온 기생이 실수를 범하거나 손님이 너무 무례하여 시비가 벌어지는 날에는 요리집 주인이 일단 책임을 져야 했으니 무척 번거롭고 신경쓰이는 일이었다.이와같은 불편을 덜기위해 생각해 낸 것이 기생조합이라는 것이다.기생들을 한군데 묶어 조합을 만들어 놓으면 연락하기 쉽고, 조합에서 모든 경우에 일어나는 시비에 대한 책임을 진다면 요리집으로서는 더없이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사방에서 모여든 기생들도 그들의 단결된 힘으로 자신의 권익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공부도 할 수 있게 됐으니 서로의 이해가 같아 조합이 생기게 되었다.이와같은 이해타산속에서 태어난 조합도 출신지방별로 따로따로 모이게되어 광교쪽에 자리잡은 광교기생조합은 서울출신과 남도출신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고 다동기생조합은 거의 평양지방출신인 서도출신들로 구성되었다.광교기생조합은 당시에 서울에서 이름 높았던 명기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춘외춘을 위시하여 김원계 유계선 장채옥 강초월 이금희 조옥향 김명주 이농주 한소홍 신능파 이부용 이하엽 김영희 정채연 김금홍 이화선등이 쟁쟁한 이름을 날렸다. 후에 광교기생조합은 한성조합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1918년 기생명단을 보면 한성조합에 등록한 인원수는 2백여명이었다.다동기생조합은 1913년 내가 13세때인 서울에 올라온지 얼마 안돼서 조직되었다. 이때 기생조합은 최소한 30명이 되어야 당국에서 허가해 주었다. 다동조합을 만들때 30명이 채안돼 다른 친구들이 급한 김에 나의 어머니 이름까지 적어넣었던 일이 지금 새삼스럽게 머리에에 떠오른다.다동조합에는 소홍 춘도 명옥 산월 명화 보경 진홍 화희 영월 섬홍 운선 진홍등 일당백의 명기들이 즐비하게 늘어있어 장안 명사들의 화제가 되고 인기의 초점이 되기도 했다.(중략)후에 경화기생조합이라는 것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당시 경무사 신태휴가 주로 3패들을 중심으로 남부시동에 마련한 것이었다.3패란 일명 더벅머리라고 불렀던 것으로 창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1패·2패와 구별되는 것이었다. 1패는 기생으로 가무와 서화를 익히고 처신과 범절을 제대로 배운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기생들읕 말하는 것이고 2패는 서군자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거의 기생출신으로 첩이 되었다가 도로나와 조합에 들어가지않고 그대로 지내는 사람으로 1패보다 한급 낮게 보았다. 어쨌든 이들도 명색이 기생조합으로 조합을 구성했으니 다른 조합원들과 격과 질이 떨어지는 관계로 충돌이 자주 일기도 했었다.언젠가 명월관에 시장에서 돈을 번 상인들이 닥쳤는데 그때만 해도 장사치를 깔보던 시대라 이름있는 기생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방에 들어갔다.[출처: 중앙일보] (47)명월관 제4화(7)> 서울의 기생은 출신끼리 조합이 나눠졌음.1900년대까지 1패,2패와 3패가 나눠져있었으며 서로 충돌이 잦았음.손님의 직업 및 지위고하에 따라 갈등을 빚기도 하였음.

일제강점기 연회모습
-1971년 1월 6일- 기생수련기생조합이 권번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내나이 14세되던 해였다.나는 대정권번에 몸을 담고 나이어린 몸으로 우선 공부부터 시작했다.대정권번은 곧 우리나라 최초의 규약를 만들었다. 최고 우두머리를 1번수라고 불렀고, 주모선배가 여기에 취임했다. 1번수밑에 2번수와 3번수가 있었고 그 다음은 나이와 연조에 따라 선후배의 위계질서가 정연했다. 흔히 말하는 깡패세계에 의리와 계급관념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기생들 사회에도 이와 못지않은 엄격한 상하구별이 있었던 것이다.이때 서로 부르는 호칭도 꽤 까다로와 한살위면 언니(평양서는 형애)라고 불렀고 두 살위면 형님, 5년 위쯤되면 아주머니라고 불렀는데 아주머니라는 말은 퍽 재미있는 뜻을 갖고 있었다.(중략)선배들이 후배들을 부를 때는 그냥 기명을 부르면 되었다.권번에 들어오는 여성들은 대부분 남의 추천을 받아오는 이가 제일 많았고, 일부는 본인들이 직접 찾아왔다.좋은 권번에서 조신한 예의범절과 노래와 춤를 배우고 지체높은 양반의 눈에 들기만하면 팔자고치는 판이라 시집가기위해 권번을 찾는 여성도 많았다.권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입회금으로 10원∼20원씩 내야했고 일단 이름을 올려놓으면 매월 50전씩 회비를 꼬박 꼬박 내야했다.권번에 이름을 올린 기생이라해서 모두 매일 권번에 나와야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집에 그냥 있으면서 권번에서 전화오면 부르는 손님에 따라 나갔고 직접 연락을 받고 나가는 경우에는 가는 곳을 꼭 권번에 알려 항상 권번이 기생들의 있는 곳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내가 속해있던 대정권번에서는 대개 20명정도의 기생들이 모여 공부를 했다. 대정권번에 공부시키러나온 선생은 하규일선생님이셨다. 하선생님은 당대의 가무에 정통을 잇는 분으로 대정권번의 학감으로 나오셨던 것이다.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나는 지금 정부종합청사 근처에 있던 정락전습소에서 노래와 춤을 배우는데 그때도 하선생이 계셨고, 다동조합시절에도 하선생님으로부터 배웠던 때문이다.하선생님은 전에 전북 진안군수를 역임한 양반이었다. 그 무렵에는 이왕직아악부에 계셨고 대정권번에는 하선생님외에 아악부악사 11명이 함께 나왔다. 공부하는 시간은 대개 아침 10시정도.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헤어졌는데 기생들이 많을 때에는 방을 두서너개 터서 넓게 썼다.노래와 춤은 먼저 이모선생에게서 배우고 여기서 성적이 우수한 사람만 골라 다시 하선생님에게 추천되었다.하선생은 주로 춤과 노래를 가르쳤고 가야금은 당시의 거장 명완벽씨가 맡았다.팔기운이 있음직한 뼈대 굵은 기생들은 주로 거문고를 배웠고, 몸이 갸냘픈 축은 양금을익히고, 가야금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노래는 우선 목이 터야 했는데 노래를 부르는 수창기생이 되려면 담이 크고 침착해야 했다. 대개 노래는 우조 6가지, 계면 6가지, 편 1∼2가지, 춤은 춘향무·장상보연지무·무고·사고무·무산향등을 익히면 어느 정도 기초수업은 끝나는 것이었다.권번에 이름을 올린 모든 기생이 의무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니었고 출석제도없어 게으른 축들에게는 편리했으나 후에 명기가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뭏든 나는 하선생님밑에서 열심히 공부한 덕으로 하선생님께서는 『이집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가끔 칭찬해 주셨다.[출처: 중앙일보] (48)제4화 명월관(8)> 권번의 규약은 엄격했으며 권번에 등록되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었으나 주위의 추천이 가장 흔했고 본인이 직접등록하는 일은 적었다.교육은 각기 다른 사람에게 받았으며 춤과 노래, 악기가 기본이 되었다.(잡가와 가요는 이후에 규율이 느슨해지면서 부를수있게 되었다 합니다.) -1971년 1월 7일-장안의 명기들이 모였던 대정권번에는 매월 삭회라는 모임이 있었다.월초에 모이는 이 모임에는 이름을 달아놓은 모든 기생들이 참석해야했다.평소에 얼굴을 보이지 않던 기생도 이날만은 빠짐없이 참석하여 권번의 제반 의결사항을 듣고 준수해야 했다.삭회가 열리면 제일 윗자리에 1향수가 자리잡고 그 좌우에 2향수와 3향수가 나란히 앉으며 좌우에 기생들이 연배순으로 두줄로 마주 보고 앉았다.삭회에서 토의되는 안건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손님접대에 나갔던 기생들이 실수를 범했거나, 기생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행위를 한사람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는 것이었다.삭회에서 지적당한 기생은 그간의 사유를 설명하고 변명했으며 그때마다 선배들이 잘잘못을 가려 처신방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가령 어느 기생이 어떤 사람과 눈이 맞아 같이 사는 경우 그 기생의 부모가 그런 남자에게는 딸을 맡길 수 없다고 권번에 와서 항의한다면 권번은 그 기생을 남자의 품에서 도로 빼앗아와도 아무런 항의도 못할 정도로 권번의 권위는 대단했고, 삭회 또한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한번은 동료기생이 당시 이름을 날리던 배우 임성구를 좋아하던 끝에 달콤한 사랑에 빠졌으나 그 기생의 어머니가 권번에 항의하는 바람에 권번은 삭회때 그 기생을 불러 무릎을 꿇게하고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혈서를 써 다짐받았던 일도 있었다.삭회가 이처럼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엄한 분위기속에서 진행되었지만 항상 딱딱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년에 한 번 삭회는 소속 기생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 그해에 행실이 제일 모범이 될만 했다든지, 동료사이에 우정을 베풀었다든지, 의로운 일을 했다든지, 노래와 춤에 놀랄만한 진경을 보인 기생에 대해서는 상금과 상품이 푸짐하게 내리기도 했다.그때 주는 선물은 대개 은수저나 금반지였다. 이것을 받은 사람은 무척 영광으로 알았고 손님들도 또한 이런 것을 갖고있는 기생에 대해서는 예의를 갖추어 함부로 굴지 못했다.[출처: 중앙일보] (49)제4화 명월관(9)> 조합에는 삭회라는 것이 있어 잘잘못을 따지거나 선물을 증여했음 권번의 권위는 대단했음의외로 기생 부모님의 입김이 강했던것으로 보입니다…-1971년 1월 8일-우선 기생이 되려면 영리하고 똑똑해야했다. 특히 점쟎은 양반들의 말뜻을 재빨리 재치있게 알아야했고, 거기에 꼭 합당한 대답을 우아하게 내놓아야 명기라 할 수 있었다.연석에 참석했을때 앞에 앉은 친구나 옆에 앉은 대감에게 저사람은 누구고, 이사람은 누구냐는 식으로 묻는다면 그 기생은 한점 깎이고 들어가는 것이다. 연석에 들어가자마자 눈치를 곤두세우고 좌석에 계신 분들이 누구누구이며 이날의 주빈과 주최자가 누군지를 눈치껏 알아내야 하는 것이었다.연석에 앉을 때에는 반드시 한무릎을 세우고 그 무릎위에 두손을 얌전히 포개 놓는다.요릿집이나 개인집에서 연석이 벌어지는 사랑놀음에 갔다올때는 시간에 따라 돈을 받게 되었다. 어떤 요릿집에서는 2시간반이면 3시간으로 넉넉히 시간을 잡아주는 후한 곳도 있었지만 2시간으로 우수리를 떼는 곳도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시간을 잘라낸다 하더라도 당시 기생들은 일언반구 항의하거나 싫은 내색을 보여서는 안되었다. 기생이 시간에 짜증내면 그 기생은 행세할 수 없었다.(중략)이처럼 시간에 따라 계산해 주는 돈도 기생이 자기손으로 직접 받는다는것은 그때 풍습으로는 있을 수 없었다. 기생이 돈을 직접 만진다는것은 천하고 상스러운 것으로 알았다.다만 기생은 시간을 적은 전표를 점잖케 들고와 권번에 맡기면 권번에선 돈을 찾아오는 번거로운 방식이었지만 이것이 기생의 체통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다.1시간에 계산되는 돈은 제일처음 1시간은 1원50전이었고, 다음부터는 몇시간이 지나 1시간에 1원20전씩 계산되었다.기생이 부름을 받는 것을 그때에는 다른 말로 표현했다.요릿집같은데서 불을때 선약이 있으면 『지휘받았다』고 말했다. 요즘처럼 남녀평등권이 헌법에 의해 보장되고 개인과 개인사이의 약속이 대등한 입장에서 맺어지는 시대라면 몰라도 그때에는 수동적으로 응하는 시대요, 그런 입장에 있었으니 지휘받았다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기생들은 대감들에게 『∼합쇼』하는 투의 경어를 썼고, 대감들은 『잘 있느냐』는 식으로 하대했다. 그러나 요릿집 사람들이나 국악원 악사들은 우리들을 깍듯이 『아씨』라고 불러줬다.기생이 요릿집에서나 개인집에서 연석에 참석할때에는 미리 다른 방에 모여 음식을 먹고 나서 들어갔다. 아무리 체통을 살리려해도 배고픈 다음에야 별수 없는 법, 우선 기생들이 배불리 먹고서야 모든 예의범절과 노래와 춤이 제대로 될수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기생들이 입는 옷색깔은 여염집 아낙들과 달라야 했던 것이 이때의 풍속이었다. 1, 2, 3향수는 옥색치마를 입었고 보통기생들이 예복으로 입는 옷색깔은 남치마였다. 노란색이나 다홍색은 여염집 부인이나 아씨들이 입는 것으로 정해져 기생들은 이 색깔을 입지 못했다.기생을은 연석에 들어가서 대감들과 마주앉아 같이 담배를 피워도 아무 상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술은 나이 차이없이 같이앉아 마실수 있었다. 그럼 담배만큼은 맞담배질을 못했던것이나 연석의 풍속에서는 대감과 기생사이에 맞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이때 기생들은 돈이 떨어지면 당시 돈놀이하던 대성사라는 집에서 매월 10원정도 꿔쓸수 있었다. 훗날 돈을 벌어 갚아도 되고, 좋은 영감을 만났을 때 영감이 원금과 그동안의 이자까지 모두 치르는 것이 그때의 풍속이었다.이무렵 기생들은 어디를 가나 외상을 잘 얻을 수 있었다. 종로네거리 포목점에 나가 돈 한푼없이 옷감을 끊어도 권번만 대면 아무 염려않고 뚝뚝 끊어주는 시절이었다. 지금 당장에는 돈이 없지만 언젠가는 돈많은 영감이 나타날테니 눈치빠른 장사치들이 외상값을 아낄 이유가 없었던 것 같다. 이쯤 신용이 있고 인심이 후한 때라 기생이 직접 나가지 않더라도 각가지 일용품은 얼마든지 외상으로 살수 있었다.요릿집이나 개인집 연석에 참석했을 때 손님이 실수로 술이나 음식을 기생의 치마폭에 쏟아도 기생들은 조금도 기분나빠해야할 필요가 없었다. 다음날쯤이면 실수한 대감이 청지기를 시켜 옷감 1벌을 꼭 사과하는 의미에서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돈있고 체면찾는 대감이 보내주시는 것이니 입고있던 옷감보다 못할리 없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출처: 중앙일보] (50)제4화 명월관(10)> 명기가 되려면 눈치가 중요했고 시간에따라 돈을 받는데 돈을 직접 만지지 않고 조합을 통해서 정산후 받음. 놀음의 주체자는 기생에게 하대하지만 맞담배를 피울수 있었으며 악사들은 기생에게 높임말을 썼음.조합이 곧 보증이 되어서 외상이 자유로웠음.

일제강점기 매일신보에 실린 명월관의 1만부 판매 축하문구와 함께 기재된 명월관의 사진 및 전화번호
-1971 1월 9일-오늘은 비록 기적에 몸을 담고있지만 일단 대감님이 잘만 보아주시면 내일은 당장 호칭이 달라지고 신세가 활짝 펴게 되는 것이었으니 평소에 행실을 조심하고 지혜와 덕을 쌓기를 게을리해서는 안되었다.요릿집이나 사랑놀음에서 불러도 임자있는 기생은 『귀먹었다』고 한마디만하면 다들 알아들었다.귀먹은 기생이라면 손님들이 별로 찾지 않았고, 동료 기생들은 자기들일처럼 숨을 죽이고 사태의 발전을 눈여겨봤다.귀먹은 상대가 잘 풀리고 제대로 발전돼가면 드디어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는 것이었다.또한 기생과 손님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대령기생이라는 것도 있었다. 어느 대감이 어느 한 기생만을 계속해서 부른다면 그 기생은 그 대감의 대령기생이었다.어쨌든 사랑의 열매가 결실되어 양반이 기생을 맞아들이는 것을 그때말로 『떼들인다』고 했다.정동에 사는 대감이 떼들이면 그 기생은 그날부터 정동마마님으로 불렸다.어제까지 불러 함께 놀았던 손님도 이날부터는 아무개마마님이라고 깎듯이 대접해야 했고 길에서 만나더라도 어제까지 놀던 허튼 수작은 씻은 듯 없어지고 아예 모르는체 의젓하게 지나쳐야 했다.이때 떼들여가는 사람의 지위에따라 기생의 호칭이 달랐다. 현직이나 전직 대감이라든가 직위가 있는 영감에게 가는 기생은 마마님이라고 불렀고 벼슬없는 양반에게 떼들여가는 기생은 아나사님이라고 불렀다.기생을 떼들어가는데는 복잡한 절차와 많은 돈이 들었다. 마음맞는 기생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것이 그때나 이때나 제일 첫째 치러야 하는 관문이다. 일단 동의을 얻은 사람은 기생집에 들어가 며칠간 같이 생활해야 한다. 이때 기생어머니는 딸의 신랑이 될 사람의 사람됨됨이와 재력등을 요모조모 저울질하게 되고 남자는 여기서 잘보여야 한다. 이무렵 기생어머니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만일 여기서 기생어머니의 미움을 산다든가 마음에 들지않게되면 성사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와같은 고비를 무사히 넘긴 양반은 곧 신방에 쓸 갖가지 가구를 장만하여 신방을 꾸미고 대성사등 대금업회사에 빚진 것이 있으면 모두 갚은 다음 버젓하게 떼들이는 것이다.한편 기생은 권번에 영업장을 되돌려주고 영감을 따라나설때 하인들에게 그동안 보살펴준 노고에 대한 보답으로 일일이 돈을 주며 석별의 정을 나눈다. 이것을 행하라고 불렀다.만약 떠나는 기생이 이같은 행하를 두둑히 내놓지 못하게 된다면 기생뿐만 아니라 떼들여가는 양반의 체면이 크게 깎이는 것이었다.그렇기 때문에 기생이 떼들여 가는 날 양반은 꽃다운 기생을 맞는 기쁨에, 기생은 대망의 남편을 만난 기쁨에, 그리고 하인배들은 두둑히 내리는 행하가 있기때문에 기생집 분위기는 화사하기만 했다.이무렵 기생을 떼들이기 위해서는 평균 2천원정도가 필요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때 순사들의 한달 봉급이 15원, 국민학교 교사 봉급이 40여원이었으니 순경의 10여년, 교사의 4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이 무렵 기생들의 옷차림새는 매우 호화스러웠다.백설이 누리를 하얗게 덮은 음력 정초가 되면 보들보들한 토끼털로 된 두루마기를 입었고, 머리에는 은비녀를 꽂았고 손에는 은가락지를 끼었다.같은 1월이지만 보름쯤되면 옷과 장식이 바뀌어 은비녀대신 진주비녀를, 은가락지 대신 다른 패물반지로 갈아끼웠다.춘삼월 1일이 되면 기생들의 패물은 비취로 모습을 바꾼다. 계절이 바뀌는 가을 10월, 초하룻날이 되면 이번에는 금비녀 금가락지 금귀개등 금패물로 장식하고, 그위에 털로된 모물을 입었다.[출처: 중앙일보] (51)제4화 명월관(11)> 기생이 시집을 가는 절차에는 기생의 동의와 기생어머니의 동의가 중요함. 기생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큰 돈이 필요했음계절(현 시간상은 겨울)에 따라 기생은 각기 다른 복식을 입음

첫글의 출처에서 눈치채신 회원님이 계실지 모르겠지만,이 글을 작성한 사람은 과거 인터넷에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신 걸그룹출신 모 연예인과 흡사한 외모로 화제가 되었던”이난향”선생이 1970년부터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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