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기생문화 下 <스크롤압박 주의>

1900년대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기생문화 上

명월관의 기생들

-1971 1월 11일-

서울에 기생조합이 처음 생겼을때에는 다동조합은 서도출신, 광교조합은 남도출신이라는 식으로 완연하게 구별되었으나 훗날에는 서로 섞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같은 조합이나 또는 권번에 속했다 하더라도 남도출신과 서도출신은 서로 구별되었다.

남도출신은 멋을 잘내는 것으로 소문났다. 철철이 유행따라 옷을 새로 지어입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서도기생들은 태가 많다고 소문났다. 태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애교가 많다는 뜻이다. 같은 권번에 있던 남도기생들과 이얘기 저얘기끝에 농담이 무르익고 속을 털어놓을수 있게쯤 되면 남도기생들은 서도기생에게 『제앞을 잘가리는 깍쟁이』라고 말했다.

서도기생들은 수심가·노량 사거리·난봉가등 시조·가사에 능했고 남도기생들은 춘향가·육자배기·흥타령등 창을 잘 불렀다.

그러나 서도기생은 어렸을때부터 노래서재에서 목을 트고 손끝을 익히기 때문에 훨씬 명창이 많았다.

어떻든 지방의 사투리를 닮을 수 없는 것처럼 서도기생이 남도기생을 흉내내거나 남도기생이 서도기생을 모방하기 힘든 노릇이어서 서로의 구별은 확연했다.

이 무렵 서도기생이 주로 모인 다동조합은 모두 서방이 없는 기생들이었기 때문에 무부기라 불렀고 광교조합에 모인 서울을 비롯한 남도기생들은 서방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아 유부기라 불렀다. 우리나라에서 기생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시대의 원화에서부터 찾는 학자도 있다.

본시 기생이란 감영이나 거읍에 그 고을 관장이 거느리는 관기로 있었고, 서울서 큰잔치가 있으면 각 지방에서 재주있고 인물이 빼어난 기생을 뽑아 올렸다. 각 고을에 있는 관기들의 의무는 고을관장은 물론이고 서울서 내려오는 괄시못할 고관대작들이 객사에 묶을 때 수청드는 것이었다.

이조 태종때 신하들이 관청에 기생을 두는 것은 풍속을 어지럽히는 것이라하여 폐지할 것을 주장했으나 영의정 하륜이 『만일 기생을 없애면 여염집 여인들이 다치게 된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없어지지 못했다. 그후 중종때에도 여락폐지론이 나왔으나 『궁신의 예연에 무엇으로 대신하겠느냐』고 아우성이었다.

이 무렵 기생의 지도·감독은 기생서방이 맡았다. 기생서방은 당시에는 서방이지만 양반이 불러 동침하길 원하면 분단장 곱게해서 바쳐야했고 빈객이 잘때에는 아궁이에 불까지 때주어야했으니 서방치고는 최하등 서방이었던 모양이다.

뿐만아니라 기생이 손님에게 실수를 하면 기생서방이 대신 벌을 받아야했으니 『네이놈, 기생서방으로 계집을 얼마나 잘못가르쳤기에 손님앞에서 이렇듯 방자하냐』는 호령이 내리고 볼기를 맞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런데 고종조에 와서는 기부가 모르는 사이에 한 사회계급을 이루고 있었다. 이때 기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각전의 별감, 포감청군관, 각 정원의 사령, 금부의 나장, 각 궁가의 청지기, 무사들이었다. 이들을 그때말로 사처소 오입장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뿌리깊은 기생제도가 강희3년(1904)에 페지되자 평양기생들은 몸만 가지고 서울로 날쌔게 올라왔으니 무부기가 되었고 서울에서 지내던 기생들에게는 대개 기생서방이라는게 붙어있어 유부기가 되었다.

고관대작들은 서울출신의 유부기보다는 서도의 무부기를 더 알아주었다.

초기 명월관시절 서울장안의 기생촌은 오궁골·곤당골·다방골이 중심이었다. 그외에 염천교부근과 시궁골 두곳에도 있었으나 지체가 좀 떨어지는 것이었다.

오궁골(신문로쪽)기생은 모두 궁중에 나가던 우두머리였고 반도「호텔」일대인 곤당골과 다동일대인 다방골이 기생촌이 된 것은 관기제도의 폐지이후 급작스럽게 생긴 것이었다.

[출처: 중앙일보] (52)제4화 명월관(12)

> 남도(삼남)기생은 옷을 잘입었고 서도기생은 태가 많았음.

기생은 결혼한 유부기와 미혼인 무부기로 나뉘었으며 대개 서도는 무부기, 남도는 유부기였음.

기생서방의 직업은 다양하였고 기생의 교육을 당담하였고 실수를 할시 대신 벌을 받기도 하였음

-1971년 1월 14일- 명월관의 화재와 태화관의 개업

황토현 네거리에 있었던 명월관이 불타버렸다.

내 기억으로는 1918년으로 생각되는데 여러 군데 확인해보았으나 명월관이 불탄 해를 정확히 기억하는 분을 만나지 못했다.
그 당시만 해도 대부분이 낮은 기와집뿐이었기 때문에 명월관은 우뚝 솟아 보였는데 뜻하지 않은 화재를 만나 얽히고 설킨 갖가지 사연과 일화를 남긴 채 잿더미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명월관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던 장춘관 주인 이종구씨의 소개로 순화궁 자리를 잡게 된 안씨는 불량배들이 들끓어 고민하는 이씨에게 명월관 별관 간판을 떼주고 자기는 순화궁에 명월관 본점 격인 태화관을 차렸다.

순화궁은 이문안 대신 집으로 불려오던 곳에 있다. 이 집터는 세종대왕의 제8남 영응대군이 당시 영의정 구치용의 아들 영수를 사위로 삼고 지어 준 곳이었다.

그후 인조가 능양군으로 있을 때 이곳에서 지냈고 다시 철종 때 안동 김씨의 세력가 김흥근이 살았다한다. 이때부터 이문안 대신 댁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김흥근은 부용당이란 연못을 파고 태화정을 짓는 등 집을 잘 가꾸었다.

다시 헌종 때 후사가 없어 고민하던 끝에 김재청의 딸 김씨가 빈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소생이 없어 헌종이 승하한 다음 이곳에 입주함으로써 비로소 순화궁이란 궁 이름이 붙게 되었다.

경빈 김씨가 세상에 떠나자 이 집을 탐낸 것은 이완용의 형이 되는 이윤용이었다. 고종황제의 윤허로 이윤용이 이 집에 들었으나 경술 합방 다음 해인 1911년에는 이완용이 들어 앉게되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한식집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옥인동에 양옥집을 커다랗게 짓고 1913년 2년만에 옮겨갔다.

이후 순화궁은 죽 비어 왔었는데 때마침 명월관이 불타버려 새 자리를 물색하던 중 후보지로 꼽히게 된 것이다. 지금 서울에서 모모하는 커다란 술집자리는 대개 예전 대관들이 살던 집 자리인 것은 태화관과 같은 처지이다.

이와 같이 유서 깊은 곳에 자리잡은 명월관 별관은 산정의 이름을 따서 태화관이라고 처음에 이름을 붙였으나 그후 태화관으로 고쳤다.

이 태화관은 훗날 기미 삼일독립선언 때 민족의 대표 33인이 모여 앉아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선언축하연을 베푼 바로 그 태화관이다.

비록 본관 간판은 장춘관(지금「피카데리」극장자리)으로 옮겨졌으나 안순환씨가 경영하는 명월관 별관인 태화관에는 옛정을 간직한 명기와 손님이 모여들어 황토현 명월관(지금동아일보자리)못지 않게 번창했다.

이 무렵 태화관에는 양악대가 등장하여 인기를 모았다.

원래 양악 대는 궁정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쓰기 위해 둔 것이 처음이었는데 몇해 세월이 흐르게 됨에 따라 이 궁정양악대 출신들이 시중에 흘러나와 우미관 양악 대와 단성사 양악 대를 꾸며 태화관에 등장하기로 했다.

손님들은 양악대의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기생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이때 유행한 춤은 지금 같은 사교춤이 아니라 아라사 사람들이 가져왔다는 앉은뱅이 춤이라 불렀다. 몸을 반쯤 낮추고 손에 든 「험블렁」을 치면서 대청을 도는 정도였다.

빼앗긴 강토를 도로 찾자는 겨레의 염원은 아득한 채 타버렸던 명월관만 다시 일어서 매일 밤 흥진비래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출처: 중앙일보] (55)|제4화 명월관(15)-태화관으로 이름 바꿔 순화궁에서 다시 개업

-1971년 1월 15일- 3.1운동

기미년 한해전해인 1918년에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손 선생님의 우이동 별장인 봉황각과 상춘원, 제동 집에 유달리 많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3월1일이 가까와질 무렵까지도 손 선생님 집 식구들은 전연 눈치를 채지 못했지만 손님들이 들어와 밤늦게 돌아갈 때까지 문밖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던 주 선배는 대충 삼일운동의 거사에 대해 눈치채고 있었다.

밤 깊은 안방에서 손병희 선생님께서는 찾아온 손님에게 『해야합니다. 단지 참가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을 뿐』이라고 말씀하시었다고 주 선배는 그때 일을 회상했다.

손병희 선생께서는 거사를 앞두고 천도교 돈을 여러 군데 분산해두신 것으로 알려졌다.

많은 돈 중의 일부는 은행에 넣어놓았고 일부는 천도교에 그리고 집에도 두셨다고 한다.

손 선생께서 집에 두신 돈은 모두 주선배가 맡았는데 훗날 삼일독립만세가 터진 다음 은행이나 천도교에 맡겼던 돈은 왜놈들에 의해 모두 압수되거나 동결되어 한푼도 못쓰게 되었지만 주 선배에게 보관시켰던 돈은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고 한다.

고종황제가 갑자기 승하하시고 이 소식을 들은 2천만 동포가 모두 슬픔을 금할 수 없었을 때 손병희 선생을 중심으로 한 민족의 지도자들은 자주독립선언준비를 착착 진행해 나갔고, 주 선배는 손병희 선생을 모시고 옆에서 이 역사적인 거사를 눈여겨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고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본사람들이 음식에 독약을 타서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져있었고, 일부에서는 고종의 시체를 다시 검사해야한다고 울부짖고 있어 일본경찰과 헌병들의 눈초리가 매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때가 때인 만큼 손병희 선생 같은 민족의 지도자주위에는 왜놈들의 감시가 한시도 떠날 날이 없었다. 이처럼 삼엄한 감시를 받으면서 기미독립선언을 준비하느라고 손병희 선생과 다른 지도자들은 가운데 사람을 놓아 연락으로 상의했다.

주 선배는 이때 이들 지도자끼리의 연락을 도맡아 해야했고 거사당일까지 조금도 실수가 없이 일을 해냈으니 그때 손 선생의 주 선배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두터웠으며 주 선배 역시 성심 성의껏 손 선생님을 따랐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간다.

고종의 승하를 슬퍼하는 2천만동포의 울음 속에서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는 도다. 위력의 시대는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내』하는 기미독립선언이 싹트고 있는 줄은 왜놈들도 전연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출처: 중앙일보] (56)-제자는 필자|<제4화>명월관(16)

-1971년 1월 18일- 3.1운동이후와 사상기생의 탄생

3·1운동이 일어난 후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는 눈도 달라졌지만 기생들이 세상을 보는 눈도 하루하루 변해갔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일본유학생들이 사각모자를 쓰고 돌아왔고, 상해를 것점으로한 애국지사들이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돈을 물쓰 듯 한다든가 전직이 높았다는 것만으로 기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목이 터져라 외치던 기미대한독립만세에서 애국이 무엇인지 알게된 기생들의 귀에 아직도 만세의 여운이 감겨있어 애국지사나 우국 청년을 따르는 이른바 사상기생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기미독립선언을 한 태화관은 일인들의 압력으로 문을 닫고 주인 안순환씨는 지금 조흥은행 본점자리에 식도원이란 요릿집을 새로 냈다. 그러므로 명월관 이름은 그전 장춘관 자리에서 명맥을 보전하면서 새 시대의 손님을 맞게 되었다.

기미독립선언 이후 일인들은 한국사람이 3인만 모여 있어도 감시하기 일쑤였다. 비교적 요릿집은 자유로운 상태이어서 애국지사들은 요릿집에 잠입하게되고 명월관은 우국지사들의 숨막히는 연락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어느 날 명월관에 나가던 남도기생 현산옥 집에는 상해에서 잠입한 애국지사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명월관 인력거꾼이 한밤중에 산옥의 집에 쪽지를 전했다. 뒤따라온 일인형사의 무슨 쪽지냐는 질문에 인력거꾼과 산옥의 대답은 『문밖놀이에 나오라는 기별쪽지』라고 똑같은 대답을 했으나 믿지 않았다.

일인형사는 산옥의 어머니 방문을 열었지만 가발을 하고 산옥 어머니와 같은 이불 속에 누운 애국지사를 발견하지 못했다한다. 이 무렵 인력거꾼 중에는 고학생들이 많았고 이들은 애국지사의 연락역을 맡은 사람이 많았다. 인력거를 타고 가던 기생이 인력거꾼이 고학생인줄을 눈치채고 그 자리에서 내려 돈을 주고 걸어갔다는 이야기는 달라진 기생들의 마음을 엿보이는 한 장면이기도 하다.

한번은 식도원에서 인촌 김성수 선생과 친일파 박춘금과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화가 난 박춘금이 육혈포를 꺼내 인촌 선생을 겨누는 바람에 방안은 초긴장상태였다 한다.

이때 기생들은 재빠르게 인촌선생 주위에 둘러서 『쏘려면 우리를 쏘라』고 막아서는 바람에 박춘금은 총을 거두었다.

이날 인촌선생께서는 많은 기생 중에서 대표 격인 이 연행을 자택으로 불러 부인에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소개하셨다고 하니 인촌 선생의 덕과 인자하신 모습을 보는 듯 선하다.

이와 같은 사상기생들의 활동은 곳곳에서 절개와 지조를 생명으로 알던 초기 명기들의 후배답게 찬란한 빛을 뿜고있었다. 그러나 일부는 검은색 강동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뾰족구두에 양산을 든 신여성흉내를 내는가하면 일부는 돈과 협박에 끌려 밀정기생이 된 사람도 없지 않았다.

이 무렵 서울에는 요릿집이 많았지만 명월관·국일관·식도원 등이 큰 것으로 손꼽혔다. 명월관은 점잖은 손님, 국일관은 장사하는 신흥부호, 식도원은 일본사람과 관공리들로 각각 손님이 대강 구별되었다. 그러나 1929년 이른바 일본이 한국을 점령통치한 20주년시정기념을 위한 조선박람회가 경복궁에서 열리게 되자 이와 같은 구분은 사라지고 한마디로 명월관을 휘저어놓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일인들은 1915년에도 시정5주년기념공진회를 서울에서 연바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미독립선언이 튀어나오자 깜짝 놀라 소위 문학정책이란 것을 펴고 제법 치적을 자랑하고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박람회를 벌였던 것이다

시골에서 돈 깨나 있다는 사람들은 모두 박람회 구경에 나섰고, 서울에 온김에 말로만 듣던 명월관을 찾아 기생들과 함께 술을 마셔보리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명월관을 찾아드니 점잖은 손님은 끊어지고 시골부자들 판이 되고 말았다. 이 바람에 명월관 기생 중에는 공부해서 가정을 꾸미거나 신여성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된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남도출신 정금죽, 서도출신 김금도 등이 제일 처음으로 일본유학을 떠났다.

또한 사각모자를 쓴 유학생과 연애에 빠져 이루지 못할 사랑에 청춘을 불태우다 정사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몇년 전에 인기 「라디오·드라머」로 방송되고 또 영화화되기도 한 장모와 기생 강명화와의 사랑과 정사도 이와 같은 시대변천이 낳은 「로맨스」였고 명기라 불리던 한남권번의 김모 기생의 자살소동도 같은 것이었다.

양장차림에 양산을 오똑하게 받쳐들고 인력거위에 올라앉은 기생의 모습 속에는 이미 서화와 기예를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워 조신하게 처신하던 옛 명기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출처: 중앙일보] (58)-제자는 필자|제4화 명월관(18)-3·1운동 후 눈뜬 애국지사들의 연락역 맡아

> 3.1운동의 여파로 민족운동으로 인해 사상기생이 등장하였고 동시에 조선물산공진회 이후 기생의 신조 변화가 발생.

1929년 조선물산공진회에서 기생의 공연

-1971년 1월 19일- 

세상이 온통 흐려지고 명월관이 난장판이 되었지만 뒤늦게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언론인과 문인들의 존재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신학문을 닦고 시대의 첨단을 걷는 이들의 발걸음이 잦아지자 명월관은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고 기생들은 이들의 재치 있는 이야기에 솔깃해졌다


대충 1930년대의 전후라고 할까. 하루는 양복장이 신사들이 그득한 연석에 모르는 사람이 한분 나타났다. 옥양목두루마기에 「도리우찌」 모자를 썼고, 신발은 자동차 「타이어」속으로 만든 경제화를 신고있었다. 어느모로 보나 좌석의 손님들과는 어울릴 옷차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손님은 방을 잘못 들어오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춘원과의 만남 중략)

한편 이 무렵 언론계에 있는 분들도 자주 명월관에 들러 모임을 갖기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하며 고당준론에 밤 깊은 줄 몰랐다.

1932년 중외일보 사회부장이시던 김팔봉 선생께서는 뜻밖의 빈객을 맞게 되었다. 그때 동남아순회 특별취재를 맡았던 미국「뉴요크·타임스」특파원 일행 4명이 우리나라에 온다는 소식이었다.

팔봉 선생께서는 곧 명월관에 1인당 15원 짜리 최고급 요릿상을 주문했다. 그러나 명월관측 대답은 그와 같은 고급 상은 일찌기 만들어 본 일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하는 수 없이 10원 짜리로 만들어달라고 주문했으나 명월관이 갖고있는 산해진미와 기술을 총동원해도 10원 짜리 상을 만들 수는 없다는 대답에 최고급요리는 결국 7원 짜리로 낙착되었다는 것이다.

팔봉 선생은 당시 동아일보의 주요한씨, 조선일보의 이관구씨 등과 함께 이들 특파원 4명을 명월관에서 맞았다. 지금생각해도 그때 장사하는 사람들은 요즘처럼 요릿 값을 먹지 않은 것까지 포함해서 바가지 씌우는 일은 없었다.

언론계 인사치고 명월관에 드나들지 않은 분이 거의 없었는데 이것은 명월관에 장춘각이라는 그윽한 특실이 있었고 2층은 피로연을 할 수 있는 큰「홀」이 있기 때문이며, 그 보다는 외상이 후하고 외상값 독촉을 심하게 하지 않은 때문도 있었던 것 같다.

이 무렵 술 마시는 풍습은 주로 요릿집에서 1차를 하고 「에인젤」낙원회관, 「퀸」등「카페」와 「바」에서 2차를 하는 것이었다. 「카페」와 「바」에는 지금처럼 「호스테스」가 흔하지 않았다. 여흥이 도도한 일부는 「콜·택시」를 불러 1원∼2원만 주면 한강변이나 근처의 절간에 「드라이브」하기도 했다. 주로 찾는 곳은 동대문 밖 개운사·우이동·화계사·청량리 청량사·탑골승방 등이었다.

[출처: 중앙일보] (59)-제자는 필자|제4화 명월관(19)-기생치마폭에 붓으로 시 쓰고 고담준론에 밤 깊은 줄도 몰라

> 육당과 뉴욕타임즈 기자와의 만남과1920년대 이후 신식문화의 유입으로 변화된 삶

-1971년 1월 20일- 태평양전쟁이후 삶

일본사람들은 1941년 「하와이」진주만을 기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제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어나고 전장이 점점 넓어짐에 따라 지원병, 학도지원병, 징용 등으로 남자들은 전쟁터로 모두 끌려나갔고, 고무·설탕·쇠고기·쌀 등 생활 필수품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판국에 명월관등 장안의 요릿집에 그전처럼 흥청거릴 수는 없게된 것이다. 문은 열었으되 찾는이 없고 손님이 설사 온다해도 차려내 올 음식이 없었다.

이 무렵 네 곳에 있던 권번을 하나로 묶으라는 지시가 내려 대동권번이 생기고 지금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자리잡게 되었다. 얼마 안돼 기생이라는 이름이 전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접대부라 이름마저 바뀌었다.

기생들의 옷은 어느덧 화려했던 비단옷대신 「몸빼」라는 일본식 롱바지가 걸치게 되었고, 점심때쯤엔 명월관에서 점심을 나르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밤1시나 2시쯤 휘영청 달 밝은 밤에 거문고를 비껴 들고 인력거위에 앉아 집으로 돌아가던 한 폭의 그림 같았던 기생모습은 그림자조차 없이 사라지고만 것이다.

피에 굶주린 왜놈들은 이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일본군의 사기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대동권번의 기생들을 동원하기에 이른 것이다. 끌려간 기생들이 할 일이란 전선에서 군인들에게 몸을 바치는 일이었으니 다른 말로 정신대역할을 한 셈이다. 미리 낌새를 채고 폐업한 기생들은 이런 곤욕을 면했으나 걸려든 기생들은 참지 못할 처지에 이르렀다하니 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발악인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기생이 살아 나타나는가 하면, 만주벌판에서 참혹하게 죽어간 다른 기생들의 소식도 간간이 들려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무상을 되씹게 했다.어떻든 다시 문을 연 명월관에는 미군 새 손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 서울대문리대에 있던 미제5공군 장병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이들은 그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야윈 기생들이였건만 치마 저고리를 입은 기생들의 우아한 몸맵시에 「원더풀」을 연발하기만 했다.

미국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게되자 명월관 기생에게도 새로운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해방되기 전에도 요릿집에 「댄스」라는 바람이 불어 춤이 유행되기 시작했지만 이때는 요릿상을 옆에 놓고 측음기를 틀면서「트로트」나 「포크·댄스」정도 추는 것이 고객이었다. 미군이 들어오자 요릿상은 다리가 높아져 「파티」형식으로 바뀌었고 손님 한사람에 기생한사람씩 붙어 오순도순 서서 이야기하는 새 풍습이 도입된 것이다.

명월관에 드나드는 기생들은 몇 마디정도의 영어를 익힐 필요가 있었고 춤은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중략)

서울에 들어온 북괴는 명월관에 종로일대를 관할하는 사무소를 설치하고 양민을 괴롭히는 등 갖가지 만행을 자행하다 북으로 도망갈 때 명월관 주인 이종구씨를 납북해갔고 명월관에는 불을 질렀다.

구 한말부터 해방, 그리고 6·25를 거쳐 거의 반세기동안 각계각층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명월관은 이렇게 하여 한 무더기 잿더미로 변해버리고 그후 지금까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젊은이들에게는 이름만 전해오고 있다.

대지9백90여 평이었던 명월관 자리 중 4백 평 위에는 지금 「피카다리」극장이 들어서고 나머지는 공터로 남아 허구한 일화와 명월관 이름은 한낱 흘러간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출처: 중앙일보] (60)-제자는 필자|제4화 명월관(20)-대전 중엔 권번도 하나로 통합 일부기생들 정신대로 끌려가

>태평양전쟁으로 일제는 기생을 접대부로 명칭을 바꾸고 정신대에 동원시켰음.

수난으로 기생들은 정신대/위안부로 끌려가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었음. 

미군정시기에는 미군이 주 고객이 되었고 유행도 달라짐

-1971년 1월 21일- 명기들 그 이후 

명월관이 없어지기 훨씬 전부터 명기들은 혹은 낭군을 맞아 혹은 임을 좇아 어지러워지기 시작한 술상 옆을 떠나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생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후배들에게 조신하게 닦은 기예를 남겨주는 육영사업에 힘쓰고 있고 일부는 속세를 등지고 산사에서 수도에 힘쓰는가하면 내가 알고있는 친구들은 대부분 자손을 여럿 두어 손자들의 재롱 속에 오붓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는 31세 때 안방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소상히 알지 못했지만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탐문하여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와 그분들의 이야기를 엮었음을 밝혀두며 혹 실수가 있었다면 용서를 빌겠다.

[출처: 중앙일보] (61)-제자는 필자|제4화 명월관(21)-뿔뿔이 흩어져 생사조차 몰라 일부는 가정 이뤄 다복한 노후

>31살에 시집을 가게 되었음. 같은 기생출신중에서도 그 이후의 삶은 다양했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난향선생이 1970년부터 1971년까지 중앙일보에 연재한 글 중 일부만 따와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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