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과연 요동을 점유했을까: 1. 요사를 믿지 마? 당서를 믿어?

돌이켜 보건대, 제가 본 발해의 지도는 최소한 3종류는 됩니다.

이렇게 요동과 서한만 연안을 강역에 넣지 않는 지도도 있고

이렇게 요동과 서한만 연안을 꽉꽉 채워넣은 지도도 있고

이렇게 요동반도 남부만 뱉어낸(?) 형태의 지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혼란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요?

당연하게도, 발해의 강역에 대해 여러 학설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지도에 표시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019 Asian Archaeology 국제학술심포지엄 러시아 극동의 선사-중세시대 고고문화연구, 그 성과와 전망” 간행물 206쪽, 도면 3.

일단 북방 영토가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건 제외하더라도, 남방과 서방에 있어서도 이견이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3종의 발해 지도는 이러한 혼란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가 됩니다.

그럼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했느냐 하면…

나름대로 알아보다 보니 재미있어서, 여기서 한번 관련 학설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해 보겠습니다.


발해의 강역에 대한 추정은 기본적으로 신·구당서와 요사에서 시작합니다.

특히 요사는 발해 영토를 직접적으로 점령한 요나라의 기록이므로 양당서보다 관련 기록이 많고 상세하여 발해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요사가 부실하기로 악명이 높은 사서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원 말기에 1년 만에 속성으로 편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해의 지리에 대한 내용도 그대로 신뢰하기에는 위험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어떻길래 그런지 예를 하나 들자면:

(···) 중종(中宗)이 그 도읍한 곳에 홀한주(忽汗州)라는 명칭을 하사하고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하였다. 12대 대이진(大彝震) 때에 참람되게 (황제라) 일컫고, 연호를 정하고, 궁궐을 본떠서 짓고, 5경(京)·15부(府)·62주(州)를 두어, 요동성국(遼東盛國)이 되었다. 홀한주는 바로 옛 평양성으로,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라고 불렀다.

– 『요사』 지리지(地理志)

라고 하여, 홀한주=평양성=중경현덕부 라는 기적의 논리가 버젓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이진에 대한 것도 뭔가 이상하지만 차치하고…) 대체 평양성이 거기에 있으면 대륙 평양설도 아니고 뭡니까. (거기 활용되기도 하던데;) 그리고 홀한주는 상경인데 같은 곳에 중경도 있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비정입니다.

“……”

대충 썼다는 티가 이렇게 팍팍 나니 정사가 맞나 싶을 지경인데요.

이상한 부분은 이것만 있는 게 아니었고,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과거의 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례로, 바로 위 기사의 위치 비정에 대해 고증한 글이 있는데요.

《요사》 지리지에서는 제대로 지리를 상고하지 않고, 드디어 동경(東京)을 일러 곧바로 평양성이라고 하였으며, 또 곧바로 홀한주라고 하였고, 또다시 곧바로 중경 현덕부라고 하여, 서로 간에 거리가 각각 1천여 리나 되는 지역들을 합해 하나로 하였으니, 매우 잘못되었다.

– 『대청일통지』

이렇게 전근대부터 비판을 받아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학계에서도 요사보다 양당서의 기록이 더 신뢰도가 높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요사 지리지의 문제는 위 같은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바로…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발해의 지리에 대해서는 《당서》에서 비록 소략하게 서술하기는 하였으나 경과 부의 위치가 질서 정연하였는데, 《요사》에서 어지러워졌다. 요나라는 발해를 병합하고는 백성을 옮기고 고을을 옮기면서 대부분 옛 명칭을 그대로 가지고 갔다. 그런데 지리지를 찬하는 자가 이를 다시 구별하지 않고 그대로 요동에 있는 주현을 가지고 견강부회하여 서술해 버렸다. 《요사》의 설을 그대로 따른다면 동경(東京)이 서경(西京)의 서쪽에 있게 되고, 중경(中京)이 또 동경의 서쪽에 있게 되니, 그래서야 되겠는가?

– 『해동역사속』 지리고(地理考)

주현의 교치(僑置)를 구분하지 않은 위치 비정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요나라는 자기네 동경도(東京道)에 발해인들을 사민시키면서 해당 주민들이 살던 주현의 이름을 그대로 동경도의 주현에 가져다 붙였는데, 요사 편찬자들이 이를 그대로 받아적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사 지리지에 나오는 ‘원래 발해의 ~주였다’, ‘본래 발해의 ~현이다’ 등의 기사들은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발해에 그런 주현이 있었다는 것(즉, 주현의 이름)은 알 수 있어도, 해당 주현의 위치가 요사 지리지가 지목하는 그곳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 또한 정벌하여 사로잡은 호(户)들로 금요(襟要)의 땅(요해처)에 주를 설치하였고, (그들이) 옛날에 살던 (곳의) 이름으로 (새로 설치한 주의) 명칭을 삼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노(私奴)들을 그 주에 투하(投下)해 설치[置]하기도 하였다.

又以征伐俘户建州襟要之地, 多因舊居名之, 加以私奴置投下州.

– 『요사』 지리지(地理志) 서문

따라서 요나라 동경도의 지명에서 발해 지명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거기가 반드시 발해 땅이었다고는 할 수가 없게 되는데요.

참고로 이거에 동사강목의 안정복도 낚이고, 대동지지의 김정호도 낚이고, 발해고의 유득공도 낚였습니다. (다만 유득공은 나중에 발해고 수정본에서 이걸 바로잡습니다.)

반면 위에 인용한 해동역사의 한진서와, 그 한진서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아방강역고의 정약용은 요사 지리지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이건 사실 해 보면 느껴지는 것이, 요사 지리지에서 말하는 대로 지리를 비정하면 발해 지도가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뚱뚱한 한반도의 위화감은 넘어가도) 보시면 알겠지만, 일단 발해의 5경부터 전부 요령 근방에 오게 되는 것은 물론, 서경압록부보다 더 서쪽에 동경용원부가 나오고 중경현덕부는 그보다도 더 서쪽에 가 버리는 등 명백히 이치에 맞지 않는 비정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중경현덕부가 안동도호부보다 더 서쪽에 놓이는…)

한진서가 괜히 ‘그래서야 되겠는가?’라고 개탄한 게 아니었던 것이죠.

심지어 안정복 본인조차도 일단 하긴 했지만 뭔가 비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이상하다고 써놓았으니, 말 다 한 셈입니다.

(···) 불열(拂涅)·철리(鐵利)·월희(越喜) (···) 세 나라는 모두 여진(女眞)의 가장 동쪽 끝에 있었다. 발해가 5천 리를 개척했으니 세 나라는 마땅히 복속되어 군현으로 열거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성경통지》가 (이들을) 모두 요동 지역으로 엮어 놓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按, 拂捏·鐵利·越喜 (···) 三國皆在女眞最東之地. 且渤海斥地五千里, 則三國當入附而開列郡縣矣. 今盛京志, 皆編在遼地, 未可知也.

– 『동사강목』 부권(附卷)

안정복이 지리 비정에 참고한 것은 청 강희~건륭 연간에 활발히 편찬된 『성경통지』인데, 성경통지는 요사 지리지의 서술을 답습했을 뿐 고증을 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를 요사 지리지에 나타난 지리 비정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럼 여기서 청나라 고증학은 다 어디 갔나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청대 고증학의 힘은 『대청일통지』에서 처음으로 발휘가 됩니다(그래서인지 이 책은 사고전서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완전하지는 않아서 결국 발해의 지리는 정약용과 한진서 등에 이르러서야 근대 학계의 추정과 가까워집니다.

자, 그럼 그 근대 학계의 추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발해는 요동을 점유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아해하실 분도 계실 것 같은데요.

사실 저도 그동안 발해=고구려 시즌 2라는 이미지를 너무 강하게 가지고 있던 탓에, 막연히 발해가 고구려 고지를 다 수복하지 않았을까 추측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코어인 요동을 빠뜨렸을 것이라고는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었죠.

(요동을 빼면 지도가 너무 안 예뻐 보이기도 하고…)

하지만 탐구를 해본 결과, 요동을 점유하지 못했다는 설에도 상당히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는데요.

이유는…

그 근거들을 무시하기가 꽤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설의 대표적인 근거 사료로는 가탐(賈耽)의 『고금군국현도사이술(古今郡國縣道四夷述)』, 일명 ‘도리기(道里記, 혹은 가탐도리기)’를 들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유명한 기록인 것 같기도 한데요.

이 글이 신당서에 인용되어 있어 문면을 확인할 수 있으며, 다음과 같습니다.

(···) [안동]도호부에서 동북쪽으로 옛 개모성(蓋牟城)과 신성(新城)을 거치고, 다시 발해의 장령부(長嶺府)를 거쳐 1,500리 가면 발해의 왕성(王城)에 이른다.

自都護府東北經古蓋牟·新城, 又經渤海長嶺府, 千五百里至渤海王城.

(···) 압록강 입구에서 배를 타고 100리 남짓 가다가, 다시 작은 배로 갈아타 동북쪽으로 30리 거슬러 올라가 박작구(泊汋口)에 이르면, 발해의 경계에 도달하게 된다[得渤海之境]. 다시 500리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현성(丸都縣城)에 이르니, (이곳은) 옛 고구려의 왕도(王都)였다. 다시 동북쪽으로 200리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神州)에 이른다.

自鴨淥江口舟行百餘里, 乃小舫泝流東北三十里至泊汋口, 得渤海之境. 又泝流五百里, 至丸都縣城, 故高麗王都. 又東北泝流二百里, 至神州.

– 『신당서』 지리지(地理志)

도리기는 801년에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당나라에서 육로와 해로로 발해에 진입하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는 통상 발해 5도 중 영주도(營州道)와 조공도(朝貢道)를 이용한 이동로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이 도리기에 등장하는 발해의 초입이 육로로는 장령부, 수로로는 박작구이므로, 발해와 당의 경계는 장령부와 박작구를 잇는 선에서 형성되게 됩니다. 또한 박작구는 압록강 입구에서 130리를 거슬러 올라간 곳에 위치해 있으므로, 당의 영역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 내부에까지 설정되게 됩니다.

실제로 발해의 영토로 알려진 5경 15부 62주 중에서는 요동 지역에 해당하는 곳을 찾을 수 없(었)고, 서한만 연안 지역에 해당하는 곳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것이 근대에 이르러 통설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요사의 기록은 기각하고, 당서의 기록을 취신한 셈이죠.

그래서 20세기 초 연구자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보통 부여부의 끝자락(현 개원시开原市)을 발해의 서쪽 경계로 보고, 거기서 장령부 변경(현 영액문英额门)을 거쳐 압록강 하류의 박작구(泊汋口)로 이어지는 선이 서남쪽 경계였다고 보며, 신라와의 국경은 신라도(新羅道)가 개설된 동쪽(현 함경도)에서는 접했으나 서쪽(현 평안도)에서는 접하지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김육불 등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즉, 당대의 요동이 무주공산의 땅 혹은 당과 발해의 완충 지대였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입장을 요동완충설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이 맨 위에 나오는 이미지의 발해 영토가 구상된 연유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계승하는 현대의 학자로는 대표적으로 김종복 교수가 있으며, 김종복 교수가 추정한 발해 영역은 (위에도 표시되어 있긴 하지만 다시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물론 반드시 위 지도가 정답이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며, 서두에서 제시한 이미지가 3장이므로 이 시리즈(?)에서 소개할 설도 3가지인데요.

일단 여기까지가 첫 번째 입장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두 번째 입장(들)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이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문헌:

김종복, 「발해시대 요동(遼東)지역의 귀속 문제」, 『史林』 31, 2008, 135-165.

김종복, 「발해의 서남쪽 경계에 대한 재고찰」, 『韓國古代史硏究』 58, 2010, 133-170.

김종복, 「실학자들의 발해지리 고증 ―안정복·유득공·한진서를 중심으로―」 『한국실학연구』 42, 2021, 113-146.

김진광, 「조선시대 사서에 담긴 발해 지리 인식의 추이 검토」 『白山學報』 124, 2022, 257-285.

박인호, 「순암 안정복의 북방 인식」, 『한국실학연구』 42, 2021, 187-229.

정석배, 「유적분포로 본 발해의 북쪽 경계문제」, 『2019 Asian Archaeology 국제학술심포지엄 러시아 극동의 선사-중세시대 고고문화연구, 그 성과와 전망』, 2019, 19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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