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과연 요동을 점유했을까: 2. 소고구려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1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발해의 요동 점유에 관한 두 번째 입장을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편에서 보았듯이, 20세기 전반까지는 발해의 강역에서 요동과 서한만 연안 지역을 제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1954년부터 이러한 경향에는 커다란 파문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일본 학자 히노 가이사부로(日野開三郞, 일야개삼랑, Kaisaburō Hino)가 ‘소고구려(小高句麗)론’을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소고구려의 위치 (확정 아님 주의)

소고구려론은 발해가 왜 요동을 영역화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과, 요동에 고구려 유민들이 남아 있었음을 고려하면 무주공산의 땅 또는 완충지로만 보기에는 부자연스럽다는 착상에서 출발합니다.

즉, 요동에 (발해와는 별개인) 고구려 유민의 국가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수장으로는 당나라에 의해 안동도독부 도독으로 파견되는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가 유력하다는 것입니다.

그 국가를 편의상 호칭하는 이름이 바로 소고구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썰이 아니라 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관점에 부합하는 듯한 몇몇 사료들이 실제로 발견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소고구려가 당나라, 돌궐, 발해 등으로 여러 차례 후원국을 바꾸어 가며 존속하다가 최종적으로는 발해에 의해 ‘간접 지배’를 받았고, 나중에 거란이 요동을 점령한 것은 바로 소고구려에 대한 점령이었다는 가설이 세워지게 됩니다.

참 듣기만 해도 엄청난 떡밥이죠.

그리고 이에 따르면 발해는 9세기(대개 선왕 시절로 추정)에 소고구려를 장악하면서 사실상 요동을 영역화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면 왜 도리지에서 발해의 경계를 내륙으로 잡았는지, 그리고 발해 행정구역에는 왜 요동이 없는지 등의 문제가 해결되는 셈이죠. 해당 지역이 소고구려였다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로써 발해가 요동을 점유하지 못했다는 종래의 학설은 폐기된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현재 소고구려론은 학계에서 소수설 내지는 일설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요 근거들에 대한 반박이 진행되었고, 특히 고씨 왕가의 행방에 대해 소고구려론과는 반대되는 사료가 발견되었거든요.

이와 관련한 내용은 대부분 도사리 님의 글 ‘소고구려’는 없었다… 아마도. (1편, 2편, 3편) 에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하지만 소고구려론이 정말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닙니다.

왜냐하면 의외로 이 소고구려론의 제기를 계기로 학계의 발해 강역 추정이 변화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히노 가이사부로 본인은 1972년까지 관련 연구를 진행했고, 논박은 그때부터 이미 있었지만, 동시에 80년대 초부터 소고구려론의 변용이 이루어집니다.

즉, 고덕무를 위시한 고씨 왕가가 통치한 소고구려는 부정되지만 그렇다고 ‘고구려 유민의 국가’로서의 소고구려까지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하여간 요동 지역에 뭔가 고구려 유민의 정치결사체가 있기는 했으며 그것이 후에 발해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는 것은 맞다는 설인데요.

특히 북한 학계의 경우, 소고구려론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고려후국(高麗侯國)론’을 제기했습니다.

요동 남부뿐 아니라 압록강 이남~평양까지의 영역(즉 기존에 발해 영역에서 제외되던 서한만 연안 지역)에까지 (고덕무 등과는 무관하게) 고구려 유민의 국가가 존재했고, 이것이 발해의 제후국(‘고려후국’)으로서 예속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럼 요동 북부는 어떻게 되냐 하면, 발해의 안원부(安遠府) 회원부(懷遠府)가 거기를 담당했다는 비정이 들어갑니다.

안원부와 회원부는 신당서에 따르면 월희고지(越喜故地), 즉 월희말갈의 옛 땅인데 공교롭게도 다음과 같은 사료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국(振國). 본래 고려이다[本高麗]. 그 땅은 영주(營州) 동쪽 2천 리에 있다. 남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서로는 월희말갈과 접하고, 동북으로는 흑수말갈에 이르며, 사방 2천 리이다.

振國. 本高麗. 其地在營州之東二千里. 南接新羅, 西接越喜靺鞨, 東北至黑水靺鞨, 地方二千里.

– 『책부원구』 외신부(外臣部) 토풍(土風) (#)

즉 월희말갈이 발해의 서쪽에 있었고 나중에 그 땅이 발해 것이 되었으므로 안원부와 회원부의 설치는 발해의 서진, 곧 요동 (북부) 지역 점유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월희말갈은 (사실 월희말갈뿐 아니라 말갈 자체가) 대체로 동북쪽에 있었다고 오랫동안 이해되어 왔기 때문에 이 설이 좀 생경하게 느껴지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 월희말갈의 위치에 대해서는 『구당서』 북적열전에서도 “월희말갈에서 동북으로는 흑수말갈에 이르는데[越憙靺鞨東北至黑水靺鞨]”라고 하여 흑수말갈의 서남쪽이라고 하고 있고, 흑수말갈은 통상 최북단의 말갈이므로 월희말갈이 발해의 서쪽에 있었다는 북한학계의 주장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한규철 교수는 이 설에 동의를 표한 바 있습니다.)

또한 보장왕이 요동에서 부흥운동을 도모하면서 연계한 ‘말갈’이 존재하므로 그게 이 말갈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에 반대되는 사료도 존재합니다.

(안동도호부에서) 동쪽으로 월희부락(越喜部落)에 이르기까지 2,500리이다. 남쪽으로 유성군(柳城郡) 경계까지 90리이다. 서쪽으로 거란(契丹) 경계까지 80리이다. 북쪽으로 발해(渤海)에 이르기까지 1,950리이다. (···) 서경(西京, 장안)에서 5,320리 떨어져 있다.

東至越喜部落二千五百里. 南至柳城郡界九十里. 西至契丹界八十里. 北至渤海一千九百五十里. (···) 去西京五千三百二十里.

– 『통전』 주군문(州郡門)

통전에 따르면 (발해보다 명백히 서쪽인) 안동도호부를 기준으로 발해보다 월희말갈이 더 멀리 있다고 되어 있으므로, 월희말갈이 발해의 서쪽에 있는 것은 부자연스럽게 됩니다.

(그래서 김종복 교수는 북한 학계의 견해에 회의적입니다.)

물론 통전의 거리 기록이라고 해서 반드시 확고한 진실이라고 할 수도 없기는 합니다.

이에 의문을 야기하는 사료도 존재하기 때문인데요: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漢) 낙랑군(樂浪郡)의 옛 땅이다. 경사(京師, 장안)에서 동쪽으로 5,100리 밖에 있다.

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 『구당서』 동이열전 고려

이 구당서의 거리 기록을 통전과 비교하면 평양은 장안에서 5,100리 떨어져 있는데 안동도호부는 5,320리 떨어져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안동도호부는 최대로 동쪽에 있었을 때가 평양이었으며 통전의 거리 기록은 안동도호부가 평양에 있을 때도 아니고 그보다 더 서쪽으로 교치되었을 때를 나타낸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장안에 더 가까워져야 정상인데 오히려 더 멀어진 것으로 기록되었으므로 그 거리 측정의 신빙성을 의심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어느 쪽이 반드시 맞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하튼 북한 학계는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 계승성을 강조하는 만큼 위와 같은 주장을 고수하게 됩니다. 심지어 대조영 때부터 이미 영유했다고까지 주장이 되고 있습니다.

고려후국론을 반영한 지도. 이때는 안원부만 요동에 왔지만 회원부도 같은 월희고지라 요동에 비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북한의 이러한 주장은 중국 학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좀 의외이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중국은 발해를 중국사로 파악하는 만큼, 발해가 요동을 점유해도 안 될 게 없기 때문에 발해의 요동 점유를 점차 인정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게 안동도호부 폐지 이전이냐 이후냐로 견해가 나뉠 뿐입니다.

이러한 추세는 남한은 물론 일본과 러시아 일부에까지 파급이 되었으며, 그 결과 현재는 국내에서도 발해가 요동을 점유했다는 입장(요동점유설)이 다수설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요동의 점유 시기에 대한 시각은 역시 분분하기는 합니다.

한국만 조금 정리해 보면,

대조영(고왕) 시기에 점유했다고 보는 학자로는 김진광 박사 등이 있고 무왕 시기에 점유했다고 보는 학자로는 한규철 교수 등이 있으며 문왕 시기에 점유했다고 보는 학자로는 권은주 교수 등이 있고 선왕대 이후에 점유했다고 보는 학자로는 송기호 교수, 박진숙 교수 등이 있습니다. 추가로 강현숙 교수, 윤재운 교수 등도 요동점유설을 지지합니다.

반면 끝까지 영유하지 않았다고 보는 학자로는 앞서 언급했듯이 김종복 교수가 있습니다. (박사 이상에서는 거의 김종복 교수가 유일한 듯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단 요동완충설의 주요 근거였던 가탐도리기에 대해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 동쪽으로 해변을 끼고 청니포(青泥浦), 도화포(桃花浦), 행화포(桃花浦), 석인왕(石人汪), 탁타만(橐駝灣)을 지나 오골강(烏骨江)까지는 8백 리이다. 이내 남쪽 방면으로 해안을 따라 오목도(烏牧島), 패강구(貝江口), 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 서북의 장구진(長口鎭)에 들어서게 된다[得新羅西北之長口鎭].

東傍海壖, 過青泥浦桃花浦杏花浦石人汪橐駝灣, 烏骨江八百里. 乃南傍海壖, 過烏牧島貝江口 椒島, 得新羅西北之長口鎭.

– 『신당서』 지리지(地理志)

물론 이것만 보면 똑같은 도리기의 다른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에 무슨 반대증거냐고 하실 수도 있지만, 중요한 점은 이게 ‘신라’로 들어가는 해로를 기술한 대목이라는 것입니다.

사료를 잘 보면 매우 많은 지명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신라 땅으로 표시된 곳은 장구진 하나밖에는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발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서북 경계란 장구진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고 보여집니다.

즉 당시 신라는 패강진을 설치한 뒤였으므로, 위에 언급된 패강구, 초도 등의 지역들은 신라의 강역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장구진부터 신라인 것처럼 나타나는 것은 실제 강역이 그래서가 아니라 당나라의 사신이 상륙한 곳이 장구진이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근방에 당관(唐官)이 있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와 있는 것으로 인하여 장구진에 당나라 사신이 상륙했을 개연성이 생겨납니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발해에 대한 도리지 기사를 보면, 박작구가 ‘발해의 경계’인 것처럼 나와 있는 것도 사실은 당나라 사신이 상륙한 곳이 박작구라는 뜻이지 발해의 강역이 박작구까지라는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물론 신라와 관련해서는 ‘경계’라고까지 말하지는 않은 것에 반하여 발해의 경우에는 명백히 ‘발해의 경계’에 도달했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둘을 동일선상에서 볼 수 있는지는 약간 꺼림칙하긴 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이로써 균열이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요동완충설에 일부 타격을 주는 사료인 것은 맞습니다.

또한 이 외에도 발해의 요동 점유 정보를 나타내는 다수의 사료들이 존재하여 현재 조명을 받고 있는데요.

확실히 사료들의 면면을 보면 요동이 발해 땅처럼 나오는 사료는 꽤 있어도 발해가 요동을 점유하지 않았다는 사료는 별로 없습니다. (요동완충설은 처음부터 도리기 외에는 그냥 점유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게 근거였기도 했죠)

다만 이러한 사료들에 반론이 가능하다는 입장도 존재하므로, 이하부터는 발해의 요동 점유를 지지하는 사료들 및 이에 대한 논박을 개략적으로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통전 고구려조 기록

(···) 그 뒤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스스로 보존하지 못하고 흩어져 신라와 말갈에 투항하니, 옛 국토는 전부 말갈에 들어갔고, 고씨 군장이 마침내 끊겼다.

其後餘衆不能自保, 散投新羅靺鞨, 舊國土盡入於靺鞨, 高氏君長遂絶.

– 『통전』 변방문(邊防門)

검모잠의 고구려 부흥 운동을 진압한 이후의 상황을 다룬 기사입니다. 옛 국토[舊國]가 모두 말갈에 들어갔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말갈이란 바로 발해라고 보아 (그리고 진짜 말갈족이라고 해도 어차피 발해가 전 말갈을 지배하게 되므로) 발해가 고구려 고지를 모두 회복한 근거로서 이 사료가 제시되곤 합니다.

참고로 이와 비슷한 문장은 구당서, 당회요, 책부원구에도 나오고 고구려 유민들이 돌궐, 신라, 말갈 등으로 투항했다고 되어 있으며 당회요 고구려조의 경우에는 옛 땅을 가져간 것이 신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신 유민들이 신라에 투항했다는 말은 안 나옵니다.)

이렇듯 디테일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고구려 고지와 유민들이 어디론가 편입되었다는 말은 공통되며 그게 누구냐고 묻는다면 발해일 공산이 크긴 합니다.

특히 구당서 고려열전에는 고덕무의 안동도독 임명(698~699) 이후로 고구려 유민들이 흩어졌다고 나오고 발해가 698년에 건국되므로 두 사건 사이에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하며 이 경우 고덕무가 안동도독부에 부임하였으므로 안동도독부의 관할 영역인 요동 역시 발해가 흡수하였다고 볼 수 있게 됩니다.

반면 이에 대하여 696년 이진충의 난 당시 안동도호부 요동주 도독의 활동이 기록에 나타나고 있음을 근거로 안동도호부가 건재했음을 주장하기도 하며, 물론 이후에는 안동도호부가 후퇴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자리에 꼭 발해의 영토가 설정되었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당나라 땅이 아니라면 발해 땅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냥 무주공산 혹은 완충지로 남겨둘 수도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요동은 요충지이므로 일반적 인식상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지만 이때 흔히 제시되는 다음의 사료가 있습니다:

무릇 이 14주에는 성지(城池)가 없고, 그래서 고려(高麗)의 항복한 호[降戶]가 여러 군진으로 흩어졌는데, 그 우두머리들[酋渠]을 도독·자사로 삼아 그들을 기미(羈縻)하였다. 천보(天寶) 연간에 5,718호(戶), 18,156구(口)를 거느렸다[領].

凡此十四州, 並無城池, 是高麗降戶散此諸軍鎮, 以其酋渠為都督·刺史羈縻之. 天寶, 領戶五千七百一十八, 口一萬八千一百五十六.

– 『구당서』 지리지(地理志)

이를 통해 천보(天寶) 연간(742~756) 안동도호부의 호구수가 5,718호 18,156구에 불과하고 방어시설도 부족한 것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요동이 황폐화되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완충지로 사용되기 적합한 상태였다고 보기도 합니다. 실제 안동도호부가 758년에 폐지되므로 이 당시 상황이 지탱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던 것은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워 보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 뒤로도 허허벌판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안동도호부의 폐지로 인하여 발해 세력이 급속히 침투하여 다시 개발이 이루어지고 요충지로 기능하였다고 할 수도 있으므로 이것만으로 속단할 수는 없긴 합니다.


(2) 구당서 지리지 기록

지금 천보(天寶) 11년(752년) 시점의 지리를 보면 당(唐)의 땅은 동쪽으로 안동부(安東府)에 이르고 (···) 남북으로는 전한(前漢)의 전성기와 같지만 동쪽은 미치지 못했고 서쪽은 더 나아갔다. 【한(漢)의 땅은 동쪽으로 낙랑·현도에 이르렀으니 (그곳이) 지금의 고려·발해이다. 지금 요동에 있는 (것은) 당(唐)의 땅이 아니다[今在遼東 非唐土也].

– 『구당서』 지리지(地理志)

이 사료는 상당히 알려져 있는 기록입니다. 이에 근거해, 8세기 중반에 요동이 당의 땅이 아니었으므로 발해가 문왕 시기에는 요동을 차지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또한 세주 부분에 발해와 함께 고려(高麗)가 등장함으로 인하여 이것이 소고구려의 존재를 증명하는 (몇 안 되고 그래서 유력한) 증거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일단 당의 땅이 동쪽으로 안동도호부까지라고 되어 있고 당시 안동도호부는 요서 고군성(故郡城)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당의 동방 영토가 한나라 때보다 작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이 기록을 다르게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다음의 사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漢)의 동쪽 경계에는 낙랑군이 있었고 서쪽 경계에는 돈황군(燉煌郡)이 있었다. 지금 동쪽 끝에 있는 안동부(安東府)는 곧 한(漢)의 요동군이다[則漢遼東郡也]. 한(漢)의 현도·낙랑 두 군은 모두 요동군의 동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동이(東夷)의 땅이 되었다.】

– 『통전』 주군문(州郡門)

이 부분은 통전 주군문의 세주이며, 그 앞 내용은 구당서에서 한나라와 당나라의 영토를 비교한 글귀와 거의 똑같고 기준 연도도 똑같이 752년입니다. (사실 세주 내용도 미묘하게만 다르죠) 그리고 통전이 구당서보다 먼저 만들어졌기 때문에 보통 통전이 원사료라고 봅니다.

그런데 통전에는 명백히 안동부가 요동군에 대응된다고 하므로 당나라는 8세기 중반에도 요동을 관할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구당서의 세주는 왜 정반대의 말을 하느냐가 문제인데요.

그래서 그 부분(今在遼東 非唐土也)을 다르게 읽어서 “지금은 요동에 (동쪽 경계가) 있으므로 (그 동쪽에 있는 낙랑군과 현도군은) 당나라 땅이 아니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한나라보다 땅이 줄어든 게 맞긴 하니까요. (그러기에는 괄호가 좀 많이 들어간다는 느낌도 듭니다만)

물론 여기서도 구 낙랑군과 현도군 지역은 당나라 치하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므로 거기 고려후국/소고구려 등이 있다고 한 견해의 경우에는 이걸 근거로 쓸 수는 있습니다.


(3) 발해 사신의 관직 및 책봉 기록

한편, 727년 당나라에 파견된 발해 사신 대창발가(大昌勃價)가 양평현개국남(襄平懸開國男)에 책봉된 것으로 인하여 양평이 곧 요양이므로 발해가 요양을 점유한 상태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보게 되면 대조영이 713년에 발해군왕으로 책봉된 것은 그럼 그때 발해만까지 차지했기 때문이냐고 반박이 들어오게 되며 북한처럼 그것까지 인정할 게 아니라면 의심해볼 만한 점이긴 합니다.

또 비슷하게 『속일본기』에 나오는 발해 사신의 관직명을 보면 758년에 파견된 사신 양승경(楊承慶)은 행목저주자사(行木底州刺史),759년에 파견된 고남신(高南申)은 현도주자사(玄菟州刺史)라고 되어 있으므로 이들이 요동 지역을 관할하던 관료였다고 보기도 합니다.

일단 목저주는 확실히 요동에 있던 지명이며 현도주는 한사군 중 현도군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이후 요동으로 교치되었고 나중에 고구려 현도성이 되었으므로 요동의 지명이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8세기 중반 당시 발해가 요동을 점유했다는 근거로 쓰이고 있습니다. (물론 말로만 관직을 준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만)


(4) 발해와 일본 간 국서에 등장하는 요양(遼陽)

일역(日域)은 동쪽으로 멀리 있고 요양(遼陽)은 서쪽으로 막혀 있으니, 두 나라가 서로 떨어진 거리는 만 리도 넘습니다.

– 『속일본후기』

돛을 펴는 것이 끊이지 않으니, 일역(日域)을 바라보며 (길이) 먼 것도 잊고 있구나. 공물 상자가 이어져 오매 요양(遼陽)을 생각하니 가까운 듯하다.

– 『속일본후기』

이것은 역시 일본의 기록인데, 전자는 841년에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국서이고 후자는 849년에 일본에서 발해에 보낸 국서입니다. 여기서 요양은 문맥상 발해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으므로, 발해가 이 당시에 요양을 점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요양이 발해의 중심지였기에 요양으로 지칭을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주장은 20세기 전반에 이미 한 번 나왔다가 철회된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요양에는 협의의 요양과 광의의 요양이라는 2가지 의미가 있으며, 광의의 요양은 (광의의 요동과 비슷하게) 요하 동쪽(의 세계)을 가리키는 추상적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양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구체적 지명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죠.

물론 생각해 보면 그렇다고 반드시 추상적 호칭이라고 볼 이유도 없지 않나 싶을 수 있는데, 이는 일역(日域)과의 비교를 통해 보면 분명해질 것 같습니다. 일역이란 통상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일본 자체를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양 역시 발해를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조금 더 합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발해가 요양을 가지고 있을 때 더 자연스러운 표현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5) 발해-거란 전쟁에 관한 거란 측 기록

동경(東京)은 바로 발해의 옛 땅이다. 아보기(阿保機, 야율아보기)가 20여 년 동안 힘써 싸워 비로소 (이곳을) 얻고 동경을 세웠다.

東京乃渤海故地, 自阿保機力戰二十餘年始得之, 建為東京.

– 『거란국지』

이 사료는 매우 유명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동이 발해 땅이었다는 직접적인 근거이기도 합니다. 『요사』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나오며, 금나라 시기에 작성된 『요동행부지(遼東行部志)』에도 유사한 기록이 나오므로 요동행부지가 원사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동행부지의 기록은 사실 이와 비슷하면서도 다소 다르며 다음과 같습니다:

당(唐)이 말년에 변방의 경략[遠略]에 힘쓰지 못하였으므로, 요동 땅은 발해 대씨의 소유가 되어 10여 세대를 지났다. 오대 때에 거란이 발해와 수십 년 혈전을 치룬 끝에 마침내 그 나라를 멸망시켰으니, 이에 요동 땅이 모두 요(遼)에게 들어갔다[入]. (···) (이곳은) 발해 때 현덕부(顯德府)였다.

– 『요동행부지』

이 기록은 전반부는 요사 지리지의 동경도 조 기록과 유사하고 후반부에 ‘혈전’을 언급하는 대목은 거란국지의 기록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현덕부 운운하는 기록은 다시 요사 지리지와 비슷합니다. (전편에 나온 그 대목 말이죠)

따라서 요사 지리지는 아마도 요동행부지를 참고하여 작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일단 요동행부지는 요동에 대한 기록이므로 이때의 요동이 광의의 요동보다는 협의의 요동일 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현덕부를 운운함으로 인하여 다시 신빙성이 떨어지게 되며 이 기록의 편찬자(왕적)가 참고한 지리 정보가 요나라 동경도의 것으로 추정되게 되고 이에 따라 왕적도 유득공, 안정복, 김정호 등처럼 낚인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또한 거란국지의 기록과는 달리 여기서는 거란이 수십 년을 싸워서 얻은 곳이 동경도 지역이 아니라 발해 전역으로 되어 있으며 물론 그 뒤에 요동을 얻었다고 하기는 하지만 다소 애매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반드시 애매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한편 거란국지와 요사에서는 동경이 주로 언급됨으로 인하여 이 기록이 지리지나 다른 부록 같은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며 거란국지 천조황제 본기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천조제는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며 실제 저 기록도 1116년 조에 나오고 이 시기는 요나라가 거의 망해가던 시기입니다. 그리고 이때 동경에서 발생한 것이 바로 발해유민 고영창(高永昌)의 반란이며 동경을 20년 싸워서 얻었다는 위의 기록은 이 반란 기사의 한가운데에 (조금은 뜬금없이) 나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잠깐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면, 갑자기 발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곧 고영창의 반란으로 인한 것이며 따라서 위 사료의 ‘발해’는 발해유민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기록의 뉘앙스가 다음과 같이 달라지게 됩니다:

“동경은 발해[유민들의] 오랜 영역이다. [야율]아보기가 20여 년 동안 힘써 싸워 비로소 (그들을) 얻어 동경을 세웠다.”

이렇게 보면 이 기사는 동경에 발해 유민들이 터를 잡고 살게 된 이유를 설명해 주는 기사이며 야율아보기가 20년 동안 전쟁을 한 결과 발해인들을 잡아와서 동경을 세웠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야율아보기가 세운 것은 동단국이고 동경으로의 강제이주는 그 뒤긴 하지만 대충 뜻은 통합니다.)

물론 통상 이렇게 해석하지는 않으며 굳이 있는 문장을 뒤틀어서까지 볼 일도 아니므로 위 기록은 발해의 요동점유설을 지지하는 사료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긴 합니다.


(6) 발해-거란 전쟁에 관한 중국 측 기록

동광(同光) 2년(924년) 7월 (···) 거란주(契丹主)가 침공해 들어오려고 계획했는데, 발해가 배후에서 방해할까 걱정하여 먼저 병사를 일으켜 발해의 요동을 쳤다[擊勃海之遼東].

– 『자치통감』

이 기록은 『구오대사』 거란전에도 나오고, 거란국지에도 비슷하게 실려 있습니다. ‘발해의 요동’이라고 명확하게 나온다는 점에서 발해 치하의 요동 지역이 있었음을 증언해 주는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구오대사에는 이와 동일한 사건을 가리키는 듯한 기록이 또 있습니다.

동광(同光) 2년 가을 7월 임술(壬戌)일, 유주(幽州)에서 거란의 아보기가 동쪽으로 발해를 공격했다[東攻渤海]고 보고하였다.

– 『구오대사』 당서(唐書)

이때 구오대사는 자치통감보다 먼저 편찬되었으므로 아마 후자가 전자의 원사료일 듯합니다. 또한 자치통감에는 거란의 속사정이 기록되어 있는 등 후대사람이 사건의 전말을 정리하는 듯한 성격이 강하므로 후자가 원사료일 공산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둘을 비교해 보면, 구오대사에는 단지 발해를 공격하였다고 되어 있는 것이 자치통감에는 발해의 요동을 공격했다는 것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사료에 없던 정보가 추가되었으므로 이에 대해 의심을 할 수 있으며, 또는 요동이라고 나와 있지만 광의의 요동으로 이해하여 발해의 아무 영토든 다 요동이 될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식으로 회의론만 견지하다 보면 결국 어떤 서술이든지 회의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이 정도는 다소 지나치다고 생각이 되며, 당시 거란은 이미 요동지역 일부에 진출해 있었으므로 거란치하의 요동과 발해치하의 요동을 구분하기 위해 발해의 요동이라고 적어준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 (즉, 거란의 속사정 관련 기록이 추가되었듯이 구체적인 공격범위에 대한 기록도 추가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이 기록 역시 발해의 요동 점유를 지지하는 사료로 통상 이해가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료들을 꽤 많이 살펴보았는데,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굵직한 사료들은 거의 다룬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고고학은 잘 모르므로 고고학을 통한 강역 추정에 대해서는 잘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중요한 연구가 있어서 소개하자면 2009년의 검토 결과 (이전에는 고구려 고분으로 알려졌던) 무순, 심양 일대의 고분군이 발해의 것일 확률이 높다고 나온 것이 있습니다. 무순과 심양은 요동에 있으므로 발해가 요동을 점유했음을 지지하는 근거들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물론 거란이 잡아온 발해 유민들이 세운 고분일 수도 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고분에서 발견된 화폐가 당 중기의 것이므로 8세기 후반에 조성된 무덤으로 추정이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검토결과가 나오지 않는 한 고고학적 근거는 심양, 무순 등지에 발해의 거점이 있었음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근거들을 통해 현재 학계에서 요동점유설이 힘을 얻고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러한 입장을 반영해 지도를 그리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그럼 여기까지가 발해의 요동 점유에 대한 두 번째 입장(요동점유설)에 대한 설명이었고요.

발해의 요동 점유에 관한 세 번째 입장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이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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