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과연 요동을 점유했을까: 3. XXX가 처리했다고? 안심이 안 되는데?

(1편과 2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전편들에 이어서, 발해의 요동 점유에 대한 세 번째 입장을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편에서 잠깐 언급했다시피, 요동완충설의 주요 논지 중 하나는 요동이 당나라 땅이 아니라고 해서 반드시 발해 땅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설 이름도 요동‘완충설’이며, 관련하여 요동이 완충지대로 적합한 지역이었을 수 있다는 근거 사료도 보았었는데요.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요동이 완충지대 = 허허벌판 = 무주공산의 땅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사실 거기에 과연 몇 명이나 살고 있었느냐와 떼놓고 생각할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좀 돌아가는 것 같기는 하지만, 고구려 멸망 이후 요동의 인구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요동 점유의 주체를 알아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데요… (늘어진다 싶으면 이 부분은 넘기셔도 됩니다)


일단 땅 자체만 보면 요동 지역이 주변보다 인구밀도가 높고 농사가 잘 되는 지역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며, 고구려 때는 요동이 인구밀집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멸망 이후에 인구가 희박해졌다고 보는 것은 보통 다음의 사료 때문입니다.

고려(高麗)의 백성들 가운데 이반(離叛)하는 자가 많아, 칙서를 내려 고려호(高麗戶) 38,200을 장강(長江)과 회수(淮水)의 남쪽 및 산남(山南)과 경사 서쪽[京西]에 있는 여러 주(州)의 공광(空曠)한 땅으로 옮기고, 빈약자(貧弱者)를 남겨 안동(安東)을 지키게 하였다.

麗之民多離叛者, 敕徙高麗戶三萬八千二百於江·淮之南, 及山南·京西諸州空曠之地, 留其貧弱者, 使守安東.

– 『자치통감』

이것은 669년 4월조의 기록이며, 비슷한 내용이 『구당서』 고종본기와 『신당서』 고려열전에도 보입니다. 다만 구당서에는 28,200호를 사민했다고 하여 1만 호가 줄어 있으며 신당서에는 아예 3만 명을 옮겼다고 하여 사민한 인구가 더욱 적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뭔가 굉장히 이상하기는 하지만 시기가 669년으로 같고 사민의 목적지도 유사하므로 이들은 통상 같은 사건을 기술하는 사료로 이해됩니다.

또한 이 외에도 『삼국사기』에 이세적이 평양성 함락 이후 20만 명을 잡아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위와 별개의 사민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만약 같은 사건을 지칭한 것이라면 38,200호가 약 20만에 상응하므로 어떻게 부합이 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시점이 다른 기록인 만큼 아마 별개의 사건일 공산이 커 보이긴 합니다.

하여간 이처럼 당나라가 수만~수십만의 고구려인을 내지로 끌고 갔기 때문에 요동의 인구가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하게 되며, 특히 자치통감에서는 가난하고 약한 자[貧弱者]를 남겼다고 되어 있으므로 고구려 고지의 유민들이 구심점을 잃고 형해화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그 우두머리들[酋渠]과 유공자를 뽑아 도독·자사 및 현령으로 제수하여, 화인(華人)과 더불어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擢其酋渠有功者授都督刺史及縣令, 與華人參理百姓.

– 『구당서』 고려열전

요동의 자제를 나누어 예속시키고, 군현에 흩어져 살게 하였다. 공(公)의 가문은 자제가 으뜸이니 안동(安東)에 자리하여 살게 하였다. 조부 적(狄)은 황조(皇朝)의 마미주도독(磨米州都督)이었고 부친 우(于)는 황조의 귀주자사(歸州刺史)였다.

分隷潦東子弟 郡縣散居 公之家 子弟首也 配住安東 祖狄 皇磨米州都督 父于 皇歸州刺史

– 남단덕(南單德) 묘지명

공(公)의 휘는 흠덕(欽德)이고, 자는 응휴(應休)이며, 발해인(渤海人)이다. 증조부는 원(瑗)으로 건안주도독(建安州都督)이었다. 조부는 회(懷)로 건안주도독을 습작(襲爵)하였다. 부는 천(千)으로 당(唐)의 좌옥검위중랑(左玉鈐衛中郞)이었다.

公諱欽德 字應休 渤海人也 曾祖瑗 建安州都督 祖懷 襲爵建安州都督 父千 唐左玉鈐衛中郞

– 고흠덕(高欽德) 묘지명

이 사료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치통감에서는 빈약자만 남겼다고 한 것과 달리, 실제로는 남단덕 가문의 사례처럼 부강한 명문가라는 이유로 남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구당서에서 말하는 ‘우두머리들’과 ‘유공자’, 즉 당나라에 협조적이었던 현지 유력자들이 이에 해당되며, 이들은 기미지배에 걸맞게 기존의 지위를 세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남단덕의 가문은 고구려 마미성의 성주 가문이고, 고흠덕의 가문은 고구려 건안성의 성주 가문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 고지에는 기존 세력이 얼마간 존속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구당서 기록을 통해 당나라 관리 역시 파견되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사실 이 때문에 기득권을 침범당한 고구려 재지세력에 의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이 한때 기세를 올리기도 하지만, 어쨌든 남단덕과 고흠덕 등이 멀쩡히 당나라에 묻힌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런 와중에도 당나라에 순응한 유력자들은 존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유력자들이 실제 얼마나 온전히 남아 있었는지는 잘 알 수가 없으며, 구당서에서도 정작 저 기록 뒤에 “그 뒤에 흩어져 도망간 자가 자못 있었다[其後頗有逃散]”고 하므로 (대체 고구려인들이 유목민족도 아니고 어디로 도망갔나 싶지만) 줄어들기는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또 계산을 복잡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나니 다음과 같습니다:

공부상서(工部尙書) 고장(高藏, 보장왕)을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으로 봉하여 요동으로 귀환하도록 하고, 고구려의 남은 무리를 안정시키게 하였다. 앞서 여러 주에 있던 고구려 사람들도 모두 고장[藏]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 고장[藏]이 요동에 이르러 반란을 도모하여 몰래 말갈과 통하였으니, 그를 소환하고 공주(邛州)로 옮겼는데 곧 죽었다. 그 사람들[其人]은 하남(河南)·농우(隴右)의 여러 주로 분산하여 옮겼는데, 그 가운데 빈약한 자는 안동(安東)의 성방(城傍)으로 머물러 살게 하였다.

以工部尙書高藏為遼東州都督, 封朝鮮王, 遣歸遼東, 安輯高麗餘衆. 高麗先在諸州者, 皆遣與藏俱歸. (···) 藏至遼東, 謀叛, 潛與靺鞨通, 召還, 徙邛州而死. 散徙其人於河南隴右諸州, 貧者留安東城傍.

– 『자치통감』

보장왕이 677년 요동에 부임해 왔다가 고구려 부흥운동을 시도한 것이 발각되어 681년에 도로 유배를 갔다는 기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장왕이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앞서 당나라 내지로 사민되었던 고구려 사람들과 함께 요동에 온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수효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이로 인하여 요동의 고구려인 수가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증가는 잠시이며 곧 보장왕의 반란 시도가 들통나면서 보장왕뿐 아니라 ‘그 사람들[其人]’도 다시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란 사실상 수수께끼이며 보장왕과 함께 요동에 왔던 사람들일 수도 있고 보장왕의 반란에 동참하려 했던 고구려인 일체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보장왕이 말갈과 연계한 것으로 인하여 말갈 일부도 같이 사민당했을 수 있으며 걸사비우나 걸걸중상 집단이 이때 영주로 이주당했다는 설도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걸걸중상이 꼭 말갈집단이라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때도 빈약자는 그대로 남겨뒀다고 하므로 아마 보장왕의 반란에 동참하려 했던 유력자들만 강제 이주를 당한 것으로 보이며 사실 유력자가 아니고서는 힘든 강제 이주를 견디기 어려우므로 이런 점이 고려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그래서 요동의 고구려 유민이 늘었는지 줄었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확실한 점은 반당 세력은 다소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다만 위에서 성방(城傍)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민족들을 편성한 일종의 군사조직입니다. 빈약자들은 사민시키지 않고 성방에 머물게 했다는 점에서 다른 고구려인들은 이미 성방으로 편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조직이 존재하고 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요동에 꽤 많은 인구가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려해야 할 사건이 이게 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십여 년 뒤에 또다시 요동 지역에 대격변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바로…

그때 거란(契丹)이 침범해 들어오니[入寇], (···) 도적들이 안동을 포위했는데, (포로로 잡은) [허]흠적(欽寂)에게 속성(屬城)의 항복하지 않은 자들[未下者]을 설득하라고 하였다. 안동도독(安東都督) 배현규(裴玄珪)가 그때 성 밑에 있었는데, 흠적이 그에게 말하기를, “광포한 도적들은 하늘이 재앙을 내려 하루아침에 멸망할 것이니, 공(公)은 단지 굳게 지키며 병사들을 격려하여, 충절(忠節)을 온전히 하시오!”라고 하였다. 도적들이 크게 노하여, 마침내 그를 해쳤다.

時契丹入寇, (···) 賊將圍安東, 令欽寂說屬城之未下者. 安東都督裴玄珪時在城下, 欽寂謂之曰, “狂賊天殃, 滅在朝夕, 公但謹守勵兵, 以全忠節.” 賊大怒, 遂害之.

– 『구당서』 허소열전(許紹列傳)

이진충의 난입니다.

이때 구당서에 ‘안동도독’이 등장함으로 인하여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자치통감에는 안동도호라고 되어 있으므로 보통 구당서를 오기라고 보며, 어쨌든 이를 통해 이진충의 난으로 인하여 안동도독부가 반란군의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안동도호는 항복하지 않았지만 따라서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사실 저것만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안동도호부가 포위될 만큼 반란군의 기세가 강력했다는 것은 분명하며 당시 요동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 상황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청변도대총관(淸邊道大總管) 건안군왕(建安郡王) 유의(攸宜, 무유의)가 요동주(遼東州) 고도독(高都督, 고구수) 번부(蕃府)에 쓴다. (···) 역적 손만참(孫萬斬, 손만영)의 진영 십여 개를 깨뜨리고 이적(夷賊) 1천 인을 사로잡은 것을 우러러 알았다[仰知]. (···) 수백 명의 병사로 2만 명의 도적을 당해냈으니, (···) 나라가 동쪽을 돌아보는 근심이 없게 하였다. (···) 번한정병(蕃漢精兵) 5만을 떼어 중랑장(中郞將) 설눌(薛訥)에게 거느리게 하고 해로로 동쪽에 들어가게 할 것이다. 선박이 이미 구비되었으니, 바라건대 도독은 병사를 격려하고 말을 먹여 그때를 기다리라.

淸邊道大總管建安郡王攸宜致書於遼東州高都督蕃府. (···) 仰知破逆賊孫萬斬十有餘陣, 幷生獲夷賊一千人. (···) 以數百之兵, 當二萬之寇, (···) 使國家無東顧之憂. (···) 分五萬蕃漢精兵, 令中郞將薛訥取海路東入. 舟楫已具, 來月亦發. 請都督勵兵秣馬, 以待此期.

– 『전당문』 위건안왕여요동서(爲建安王與遼東書)

이것은 697년 1월의 기록으로, 당시 이진충의 난 진압 책임자였던 무유의(이름에서 알 수 있듯 측천무후의 인척)가 요동주도독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편지에는 고도독이라고만 하지만 같은 전당문에 있는 위건안왕하파적표(爲建安王賀破賊表)에는 고구수(高仇須)라고 나와 있으므로 이름이 고구수임을 알 수 있으며, 이 인물이 손만영의 공격을 격파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고구수가 고작 수백 명만 거느리고 있었음에 반해 적군은 2만에 달한다고 하므로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수적 열세가 있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며 당시 요동 지역에서 반란군의 세력이 토벌군보다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고구수가 결국 승리하였으므로 판도가 뒤바뀐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고 실제로 무유의도 동쪽의 근심이 없어졌다며 다 해결된 듯이 말하고 있지만, 현실은 바로 다음에 5만 명의 지원군을 파견하겠다고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아직 적군이 많이 남아 있고 이를 위해 5만 명 정도는 파견하여야 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총사령관급의 인사인 무유의가 직접 요동주 도독에게 지시를 내리고 격려를 하고 있으며 고구수 역시 안동도호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무유의와 소통하고 있다는 것에서 이 당시 안동도호부가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위에 나온 안동도호부 전투는 반란군이 승리했던 것일 수도 있으며, 실제로 그 이후에는 안동도호 배현규가 전혀 언급되지 않으므로 그렇게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이후 시기에 대해서 또다시 의미심장한 기록이 있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 푸른 파도를 건너 무리 속에서 기병을 선발하였다. 비록 맥(貊)과 호(虎)가 뜻이 맞았지만, 갑옷을 입은 자들은 다투어 달려왔고, 다만 벌과 전갈이 길에 가득하여, 창을 든 자들은 모이지 않았다.

공(公)은 2천여 병사로 수만 명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칠종칠금(七縱七擒)의 공로가 있었으니 싸움에 대부분 이겼다. 만세통천(萬歲通天) 2년(697년) 정월에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 좌우림군상하(左羽林軍上下)에 제수되었다. (···) (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씀하셨다. “(···) 또 성문(性文)은 고려 부녀자 셋[高麗婦女三人]을 데리고 성곽과 해자를 지키며 적(賊)과 힘겹게 싸우니, 각각 의복 한 구(具)를 내리고, 아울러 물자 30단을 내린다.”

그러나 흉광(兇狂)함이 날로 성대해져도 구원이 이르지 않으니, 무리가 적어 힘이 다르고, 안위의 형세가 배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고립되고 지세는 단절되었으며, 병사는 다하고 화살도 떨어졌다. 주야로 포위를 공격하였지만, 졸종(卒從)이 함몰되니 포로로 잡혀 (···) 만세통천(萬歲通天) 2년 5월 23일에 마미성(磨米城)에서 죽으니 당시 나이 72세였다.

徑度滄波, 選徒徵騎. 雖貊虎叶志, 擐甲者爭馳, 而蜂蠆盈途, 提戈者未集. 公以二千餘兵, 擊數萬之衆, 七擒有效, 三捷居多. 萬歲通天二年正月, 制除左玉鈐衛大將軍, 左羽林軍上下. (···) 有勅稱之曰, “(···) 又性文下高麗婦女三人, 固守城隍, 与賊苦戰, 各賜衣服一具, 幷賚物卅段.” 但兇狂日熾, 救援不臻, 衆寡力殊, 安危勢倍. 城孤地絶, 兵盡矢窮, 日夜攻圍, 卒從陷沒, 爲虜所執, (···) 以萬歲通天二年 五月 廿三日, 薨於磨米城, 春秋七十有二.

– 고질(高質) 묘지명

고질은 원래 고구려의 위두대형이었다가 당나라에 투항한 인물로, 돌궐 전선에서 활약했으며 식읍 2천 호의 유성현개국공(柳城縣開國公) 작위까지 받은 고위급 인사였습니다. 그런데 이진충의 난 당시 요동의 마미성에서 죽은 것으로 확인이 됩니다. 따라서 정황상 고질이 고구려 유민이므로 요동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파견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뒤에서 확인되듯 무슨 원맨아미처럼 투입된 듯한 느낌이 나므로 좀 이상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묘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실제 고구려인들[貊]은 반당 정서가 팽배하여 호(虎)와 뜻이 맞았다고 하며 이 호는 오랑캐 호(胡)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므로 거란족과 연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고질은 충분한 모병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반란세력으로 보이는 ‘벌’과 ‘전갈’이 길가에 가득했다고 하며 구체적인 숫자로는 토벌군 2천 명과 반란군 ‘수만 명’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수만 명은 앞서 손만영의 2만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서로 다른 병력이라고 볼 경우에는 사방팔방에 만 단위의 반란군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요동의 고구려인들이 아직 매우 많이 남아 있었을 뿐 아니라 군사력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고질이 (남단덕 가문의 근거지이기도 했던) 마미성을 수비한 것으로 보아 친당적 고구려인들도 있었지만, 병력은 10배의 차이가 나며 형세도 배나 차이가 났다고 했으며 부녀자들까지 동원했고 그랬어도 함락되었으므로 사실상 그 일대는 반당 세력이 장악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앞에서 설눌의 지원군 5만 명을 파병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미성에는 그러한 지원군이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질이나 설눌이나 해로로 요동에 온 것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고질은 마미성까지 갔던 반면 설눌은 가지 못했다는 것이며 계획대로 5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그랬다면 이는 요동지역의 상황이 그만큼 당나라에 적대적으로 변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관련 기록을 보면:

(적의 무리가) 개미처럼 모여들고 열매처럼 번성하며, 승냥이 같은 어금니[豺牙]도 더욱 사나워져서, 산융(山戎)과 결탁하여 서쪽으로 침공하고, 도이(島夷)와 연대하여 동쪽으로 진입했습니다.

蟻聚實繁, 豺牙益厲, 結山戎以西寇, 連島夷而東入.

– 『문원영화(文苑英華)』

만세통천(萬歲通天) 2년 3월 삭일(朔日) (···) 거란의 흉악한 무리들이 감히 하늘의 법도를 어지럽히니, 벌떼가 환산(丸山)에 모여들었고, 돼지들이 요야(遼野)를 잠식하였다.

萬歲通天二年三月朔日, (···) 契丹凶羯, 敢亂天常, 乃蜂聚丸山, 豕食遼野.

– 『진백옥문집(陳伯玉文集)』

도이(島夷)는 여러 뜻이 있지만 말갈의 비칭이기도 하며 후에 발해의 비칭으로도 쓰이는 만큼 말갈족 및 고구려 유민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환산(丸山)은 고구려의 환도성을 말하며 요야(遼野)는 요동 평원을 뜻하므로 압록강에서 요동벌에 이르는 고구려 고지가 반당세력에게 장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고질 묘지명에서도 ‘벌’이 등장했는데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이쯤 되면 고구려 부흥운동 시즌 3가 일어났으며 거의 성공하고 있다는 인식이 가능하고 안동도호부사 배현규, 요동주도독 고구수, 중랑장 설눌 등이 진압에 어려움을 겪을 만큼 부흥군의 세력이 성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자치통감에 따르면 설눌은 698년에 남전현령(藍田縣令)이었던 것으로 나오므로 요동에서 실패를 하여 산남 지방으로 일시 좌천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 698년에 안동도경략安東道經略으로 발탁되므로 다시 요동에 파견되긴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세력이 컸다면 부흥운동의 구심점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며, 실제로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유명한 이름들이 대거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에 이르려 거란의 이만영(李萬榮, 이진충과 손만영)이 반란하고 영주를 공격해 함락시키니, 고려별종(高麗別種) 대사리(大舍利) 걸걸중상(乞乞仲象)이 말갈 반란자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달아나 요동을 지키며, 고려의 옛 땅을 나누어 왕 노릇을 하였다[分王]. 측천(則天, 측천무후)이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 대사리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봉하였다. (그러나) 걸사비우가 (책봉을) 받지 않으니, 측천이 장군 이해고(李楷固)에게 명하여 그 진영을 공격해[臨陳] (걸사비우를) 참하였다. 그때 걸걸중상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자리를 이어 [걸사]비우의 무리까지 병합하여, 승병정호(勝兵丁戶) 40여 만으로 읍루(挹婁)의 옛 땅에 웅거하였다.

至萬歲通天中, 契丹李萬榮反, 攻陷營府, 有高麗別種大舍利乞乞仲象, 與靺鞨反人乞四比羽走保遼東, 分王高麗故地. 則天封乞四比羽許國公, 大舍利乞乞仲象震國公. 乞四比羽不受命, 則天命將軍李楷固臨陳斬之. 時乞乞仲象已死, 其子大祚榮繼立, 倂有比羽之衆, 勝兵丁戶四十餘萬, 保據挹婁故地.

– 『오대회요』 발해(渤海)

대조영이 날래고 용맹하며 용병(用兵)에 뛰어났으므로, 말갈 무리와 고려 유민[餘燼]이 점점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祚榮驍勇善用兵, 靺鞨之衆及高麗餘燼, 稍稍歸之.

– 『구당서』 발해말갈(渤海靺鞨)

보통 대조영 집단은 천문령을 지나서 이해고의 군대를 격파한 것으로 인하여 필사의 탈출을 한 것으로 생각되기 쉽고 그게 아니더라도 항상 이동만을 원했던 것처럼 흔히 여겨지고 있지만, 위 사료들을 보면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이 외에도 신당서에는 측천무후가 공작으로 봉하면서 ‘사면’을 해줬다고 나오므로 그 전에 반란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으며 구당서에는 ‘이진충의 잔당’이라고 나오므로 이진충의 난에 동조하였음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오대회요에서는 명백히 요동에서 세력을 일구고 왕노릇을 했다고 나오며 그 세력이 상당하여 측천무후가 공작으로 책봉하여 회유하려고 했을 정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회유가 실패하자 대대적인 토벌을 하여 걸사비우가 전사하지만 그러고도 대조영의 무리는 40만이므로 이들이 바로 요동 곳곳에서 출몰하던 반당세력의 한 규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승병정호 40만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많이 보이기도 하며 또 읍루땅에 웅거할 때 그랬다는 뜻도 되므로 요동에서 40만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구당서에는 발해의 편호(編戶)가 10만이었다고 하는데 승병정호가 인구수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10만 호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구당서에서는 돌궐의 묵철가한이 전성기에 40만의 기병을 보유했다고 하므로 조금만 강성해 보여도 40만이라고 말하고 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걸걸중상 등이 수만 명을 거느리고 전쟁을 한 것은 사실로 보이며 배현규나 고구수와 싸운 것도 손만영이 아니라 고구려 부흥군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이때 많은 승리를 거두며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에 대조영이 군사적 명성을 널리 떨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만세통천 연간에 일어난 요동의 반란에서 주동자는 이들이었을 것이며 다수의 고구려 유민들이 이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대조영 집단은 나중에 동모산으로 가서 발해를 세우므로 반당세력들이 또다시 요동에서 대거 빠져나가는 결과가 도출됨을 알 수 있으며, 정말 40만은 아니었더라도 당시 반당세력이 친당세력을 압도했으므로 요동이 텅 빌 만큼 많은 수가 이탈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당서와 통전 등에서 고구려 고지의 백성들이 말갈, 신라, 돌궐 등으로 내투했다고 나와 있으므로 요동의 인구 감소를 보여주는 사료도 분명합니다. (또한 전쟁통이므로 인구가 더욱 줄었을 것입니다.)

지금 바다 가운데에서 식량을 나누어 옮기니, 풍파에 뒤흔들려 물에 빠지는 자가 많습니다. 병사들에 준하는 식량을 계산해 보니, 오히려 매우 부족합니다. (···) 요동에서 지킬 곳은 이미 석전(石田)이며, 말갈은 멀리 떨어져 있어 더욱 계륵(雞肋)입니다. 그 땅을 얻어도 농사짓고 길쌈하는 것[耕織]이 충분하지 않고, 그 사람들을 얻어도 부세(賦稅)가 만족스럽지 않으니, 신은 설눌(薛訥)로 하여금 그만두게 하고, 안동진(廢安東)을 폐하기를 청합니다.

今以海中分為兩運, 風波飄蕩, 沒溺至多. 準兵計糧, 猶苦不足. 且中國之與蕃夷, 天文自隔, 遼東所守, 已是石田, 靺鞨遐方, 更爲雞肋. 今欲肥四夷而瘠中國, 恐非通典. 且得其地不足以耕織, 得其人不足以賦稅, 臣請罷薛訥, 廢安東鎮.

– 『통전』 번방문(邊防門)

이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것이 바로 유명한 적인걸의 상소입니다. 적인걸이 상소를 한 시점은 697년 10월이라는 말도 있고 699년이라는 말도 있지만 구당서에 ‘또 청했다[又請]’는 말이 나오므로 비슷한 상소를 2번 했다고 처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소 애매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699년 시점에는 요동이 쑥대밭[石田]이 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농지도 파괴되고 사람도 줄어들어 지킬 가치가 없는 곳으로 변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대조영이 동모산으로 간 것은 설눌의 진격 때문일 수도 있지만 요동이 너무 황폐화되어서 떠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를 보면 안동도호부가 이 즈음에 안동도독부가 되었다가 705년에 유주로 후퇴하여 부활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고도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후퇴하였으므로 요동은 허허벌판으로 방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전편의 내용을 참고하면 이후 요동에 발해가 진출하였던 것이 사료와 유적으로 확인되므로 저렇게 방기된 다음 시간이 흐르자 적어도 선왕대부터는 차츰 발해인들이 와서 살았고 이후 거란의 침공을 받았다고 하면 어떻게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성력(聖歷) 원년(698년) 6월 30일,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로 이름을 고쳤다. 【고구(高仇)를 도독으로 삼았다.】

聖歷元年六月三十日, 更名安東都督府. 【以高仇, 領都督.】

– 『옥해(玉海)』 (#)

이 사료의 세주에서 보이는 고구(高仇)는 이제까지 듣도 보도 못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잘 생각해 보면 앞에서 수백 명으로 2만 명을 무찌른 인물로 나온 고구수(高仇須)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수(須)가 써있지 않음으로 인하여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만약 당시 요동에서 누군가 안동도독으로 임명되었다면 고구수는 그것에 적합한 사람이 맞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안동도호였던 배현규가 존재하므로 어째서 고구수가 수장이 되는지 의문이 들 수 있으며 따라서 이를 토대로 안동도호부는 이미 함락되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위 기록에서 중요한 점은 그게 아니라 요동주도독이었던 고구수는 건재했다는 것이며 (저 당시에도 요동성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이전에 설눌이 마미성에 접근하지 못했던 것과 달리 조정의 명령이 전달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고덕무가 698년 또는 699년에 안동도독으로 부임해 옴에 따라 고구수가 고덕무와 동일인물이라고 보기도 하며 동일인물이든 아니든 흥미로운 떡밥이지만 여기서는 일단 별론으로 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대조영의 동진 이후의 상황에 대해 이보다 훨씬 충격적인 사료도 존재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공(公)은 평양(平壤)에서 나고 살았으나, 장성해서는 요동(潦東)에 예속되었다.

公生居平壤, 長隷潦東.

– 남단덕(南單德) 묘지명

이것은 앞에서도 나왔던 고구려 유민 남단덕의 출생지와 성장지를 기록한 것으로, 몇 자 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많은 생각이 들게 합니다.

왜냐하면, 남단덕은 699년생이기 때문입니다.

699년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31년 뒤이며 발해가 건국되고 1년 뒤이며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오고서도 23년 뒤입니다. 게다가 앞서 보았듯이 남단덕의 가문은 요동 마미성의 성주 가문으로서 남단덕의 조부는 당나라의 기미주로 편성된 마미성에서 마미주도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단덕은 뜬금없이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거기서 살기까지 했으며 장성해서도 요동에 일부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요동이 아니라 안동으로 읽어야 한다는 설도 있긴 합니다만)

따라서 이 기록을 취신할 경우에는 (물론 취신하지 않는 입장도 있습니다만) 평양에 사실 당나라의 기미주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으며 요동에도 그랬다는 말이 되고 당나라의 원거리 통제 역량을 재고해 보아야 하며 요동에서 평양을 지배할 수 있었다면 요서에서도 요동을 지배할 수 있었다고 볼 여지가 생깁니다. 또한 남단덕이 장성한 시점에도 요동 등지에 어느 정도 인구가 있었고 생활 기반이 존재하였기에 거기서 살았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요동 인구’에 대해 증거해 주는 듯한 사료가 존재합니다.

칙지절(勅持節) 선로말갈사(宣勞靺羯使) 홍려경(鴻臚卿) 최흔(崔忻)이 우물 두 개를 파서 영원히 증거가 되게 하고자 한다. 개원(開元) 2년(714년) 5월 18일.

勅持節宣勞靺羯使鴻臚卿崔忻, 井兩口, 永爲記驗, 開元二年五月十八日

– 홍려정(鴻臚井) 석각

이것은 발해사 연구에서 상당히 유명한 흥려정 석각으로, 당나라 사신이 발해를 다녀오면서 요동반도 남단에 있는 여순(현 뤼순)에 새긴 것입니다.

석각의 주요 내용은 우물을 팠다는 것인데 시점은 714년으로 나와 있으며 이때는 남단덕이 15세가 되어 요동에 갔을 수도 있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우물을 파는 일은 일종의 대민 지원사업이며 물론 최흔이 직접 파지야 않았겠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쓰고 지시를 내리고 기념 문구까지 새겼다는 점에서 상당히 공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해당 지역이 당나라의 기미주였기에 쉬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또한 생각해 보면 요동반도 지역은 요동 북부와는 달리 전투 사실이 거의 확인되지 않으며 설눌이 해로로 요동에 지원을 갔으므로 일단 요동반도부터 안정화하여 이 지역에는 전란의 영향이 적게 미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미지배가 유지되고 인구가 남아있는 것이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당나라의 행정력이 계속 작동했다고 볼 수 있는 또다른 기록도 존재합니다.

증조할아버지 회(懷)는 당(唐)의 운휘장군(雲麾將軍) 건안주도독(建安州都督)이었고, 할아버지 천(千)은 당(唐) 좌옥검위중랑(左玉鈐衛中郞)으로 건안주도독을 습작(襲爵)하였다. 아버지 흠덕(欽德)은 건(안)주도독을 세습하고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유주부절도(幽州副節度) 지평로군사(知平盧軍事)로서 높은 관직을 대대로 계승하였다.

曾祖懷, 唐雲麾將軍, 建安州都督. 祖千, 唐左玉鈐衛中郞, 襲爵建安州都督. 父欽德, 襲建(安)州都督, 皇右武衛將軍, 幽州副節度知平盧軍事, 承世簪組.

– 고원망(高遠望) 묘지명

여기서 고원망이란 앞에 나왔던 고흠덕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묘지명에 따르면 (고흠덕 묘지명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고흠덕 역시 당나라의 건안주도독을 역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흠덕은 733년에 죽었으므로 그 이전의 어느 시기까지는 건안성 일대가 당의 기미주 체제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건안성은 지리상 서해에 가까운 요동 남부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들을 지도에 나타내 보면

노란색으로 표시한 것이 요동성(=양평, 요양), 석대자산성, 현도성, 목저성이며 빨간색으로 표시한 것이 신성(안동도호부), 마미성이고 파란색으로 표시한 것이 건안성과 여순입니다. (정확한 표시는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도를 보면 순간 떠오르는 것이, 나중에 발해가 차지했다고 사료에 나오거나(요동성, 현도성, 목저성) 유적이 발굴된 곳(석대자산성) 및 고구려 부흥군이 기세를 올린 지역들(신성, 마미성)은 요동 북부입니다. 반면 당나라의 지배가 지속된 듯한 지역들(건안성, 여순)은 요동 남부입니다.

따라서 전 요동의 인구수가 연동되는 것이 아니고 같은 행정구역이라고 모두가 일심동체인 것도 아니므로 고구려 부흥운동 등으로 인해 공동화된 지역은 사실 요동 북부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요동 남부는 당나라 치하이고 요동 북부는 발해 치하인 상황도 가능하며 어차피 요동 남부는 기미주이고 인구가 아주 많지도 않을 것이므로 발해에게도 별로 위협적이지 않아서 그 상태로도 일종의 완충지대처럼 기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추론에 불과하며 실제로 어떠했는지는 사료를 찾아내야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주장이 현재 존재하기는 하며, 따라서 이제부터 (뭔가 엄청나게 돌아서 온 것 같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이미 세월이 오래 지났음에도, 또한 구원이 없고, 게다가 해족 오랑캐[奚虜]가 침공하므로, 희일(希逸)은 그 군사 2만여 인을 이끌고, 한편으로는 행군하고 한편으로는 싸우면서[且行且戰], 마침내 청주(青州)에 도달하였다.

既淹歲月, 且無救援, 又為奚虜所侵, 希逸拔其軍二萬余人, 且行且戰, 遂達於青州.

– 『구당서』 후희일열전(侯希逸列傳)

이것은 안사의 난 당시 영주(榮州)에 있었던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의 행보를 묘사한 기록입니다. 당시 평로절도사는 후희일(侯希逸)이었는데, 후희일은 별로 유명하지 않지만 이정기(李正己)는 꽤 유명하며 후희일 다음에 평로절도사가 되는 사람이 바로 이정기입니다.

따라서 이정기는 당시 평로절도사 소속이었으며 그냥 소속인 정도가 아니라 후희일의 절도사 등극을 도와 이미 주요 인사였고 후희일과도 친척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이 평로군이 도저히 담당지를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자 761년에 2만 군세를 이끌고 산동반도의 청주로 이동하였다는 것입니다. (다만 총병력이 2만이기는 한데 병사들의 가족이나 여타 식솔들이 여기에 포함되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까지 합쳐서 10만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과연 후희일, 이정기 등이 어떤 방식으로 청주까지 갔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이때 신당서를 참고할 경우,

그러나 외로운 군대에 구원이 없고, 또 해(奚)가 침략하므로, 이에 그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청주(青州)로 들어가 근거지로 삼으니, (그곳을) 평로(平盧)가 널리 점령하였다.

然孤軍無援, 又為奚侵掠, 乃拔其軍二萬, 浮海入青州據之, 平盧遂陷.

– 『신당서』 후희일열전(侯希逸列傳)

라고 하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수 있으며, 바다를 건넜다는 것에서 산동과 요동을 잇는 해로를 이용한 것은 아닐까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평로군은 서쪽 유주에 있던 반란군(범양절도사)과 싸우던 와중에 북쪽에서는 해족이 침략하여 더는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자 대이동을 감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적군이 별로 없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요동에서 배를 타고 산동으로 가는 것은 안전한 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냥 생각하기에는 상당히 개연성 있는 설입니다. 이에 입각하여 평로군의 이동 경로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공교롭게도, 건안성을 지나 요동반도로 들어가서 여순항에서 배를 타는 경로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로가 맞다고 할 경우에는 평로군이 요동반도를 지나갔다는 것이 되며, 그러면 요동 남부가 아직 기미주라는 설이 강화될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2만 명의 군대를 보급할 만한 생산력 및 인구가 존재하였다는 말이 됩니다. 또한 2만 명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기 위해 필요한 선박이나 여타 장비들을 준비할 수 있을 만큼 번화하였다는 말도 됩니다.

또한 행군을 저렇게 했다면 요동반도를 통으로 종단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이에 따라 평로군이 지나간 지역들은 보다 강력한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평로절도사는 당시 안동도호부를 명목상 관할하였으므로 이때를 기회로 기미주들을 한 번 더 단속했을 수도 있으며, 이정기가 고구려 유민 출신이므로 교섭에서 이점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평로군의 남천을 계기로 요동반도의 기미주들이 평로절도사의 산하로 들어오게 된다고 볼 수가 있으며, 이후 이정기가 후희일을 쫓아내고 산동 지역을 대거 장악하여 강력한 번진(藩鎭) 세력이 됨에 따라 요동반도 역시 이정기 일가의 세력권으로 편입된다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볼 때 훗날 이정기가 산동을 중심으로 15주를 차지하여 치청절도사로 임명을 받은 후에도 정식 직함은 평로치청절도사였던 이유가 설명이 됩니다. 즉 평로절도사의 담당지인 요동의 일부를 배후지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본거지가 산동임에도 ‘평로’를 떼버리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이렇게 보게 되면 천보 연간에 안동도호부가 관리하던 호구수가 5,718호(戶), 18,156구(口)에 불과했던 것은 어떻게 설명하냐고 반론이 들어오게 됩니다만, 사실 이를 무마할 만한 사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부락) 중 큰 것을 도독부(都督府)로 만들어, 그 수령들을 도독(都督)·장사(刺史)로 임명하고, 모두 세습할 수 있도록 하였다. ​비록 그 공부(貢賦, 세금)와 판적(版籍, 호구)의 대부분은 호부(户部)에 올리지 않았으나, 성인의 가르침[聲敎]이 미치는 바가 있어, 모든 변방의 도독(都督)·도호(都護)가 다스리는 데에 율령과 격식[令式]이 뚜렷하였다.

其大者爲都督府, 以其首領爲都督·刺史, 皆得世襲. 雖貢賦版籍, 多不上户部, 然聲敎所暨, 皆邊州都督·都護所領, 著於令式.

– 『신당서』 기미주(羈縻州)

이 기록에 따르면, 기미주는 본래 호구수를 잘 보고하지 않는 특성이 있으므로, 안동도호부에 보고된 것은 전체 호구수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오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나라의 변방 통제력이 느슨해져 점점 보고가 불성실하게 되었다고 하면 의외로 말이 됩니다.

또한 그 이후에 이정기가 요동반도를 관리하게 되면 더더욱 중앙정부에 호구를 보고할 필요가 없으며, 심지어는 스스로 요동반도를 통제하고 있다는 것 자체도 굳이 보고할 필요가 없으므로, 평로치청번진이 요동까지 관할했을 가능성은 분명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정기는 765년에 후희일을 쫓아낸 뒤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를 제수받는데, 이에 따라 신라 및 발해와의 외교는 모두 이정기가 관리하게 됩니다. 이 사행길은 가탐의 도리기에 나와 있으며, 평로치청번진이 819년까지 존속했으므로 801년에 저술된 도리기의 묘사는 이 당시의 것을 반영했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이에 따르면,

발해로 가는 해로든 신라로 가는 해로든 모두 요동반도를 거쳐간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특히 도리진(都里鎭)은 군사기지인 진(鎭)으로서 누군가 이 항로에 군사력을 투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 줍니다. 그리고 그런 세력이란 발해와 신라에 대한 외교와 무역을 전담하는 평로치청번진일 공산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볼 경우 가장 재미있는 점은, 소고구려론의 (한쪽)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아래 기록들이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원화(元和) 13년(818년) 4월, 그 나라(고구려)가 악물(樂物) 양 부(兩部)를 바쳤다.

元和十三年四月, 其國進樂物兩部.

– 『당회요』 고구려(高句麗)

흥덕왕 때인 태화(太和) 원년(827년) 정미(丁未)에, (당나라에) 유학하였던 스님인 고려승[髙䴡釋] 구덕(丘德)이 불경 및 상자를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여러 절의 승려들과 함께 나가 흥륜사(興輪寺) 앞길에서 (구덕을) 맞이하였다.

興德王代大和元年丁未, 入學僧髙䴡釋丘徳賷佛經若干凾來, 王與諸寺僧徒出迎于興輪寺前路.

– 『삼국유사』 탑상(塔像)

평로치청번진이 멸망하는 것은 819년이지만 당 조정의 토벌은 818년 7월부터 시작했으며 절도사 이사도는 사실 817년에 항복 의사를 밝혔다가 철회하는 등 오락가락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따라서 요동반도의 기미주들이 평로치청번진이 곧 망하리라 여기고 두려워하며 자체적으로 결집해 당나라에 조공을 보냈다고 하면 위 818년 조공 기사는 어느 정도 해명됩니다.

마찬가지로 827년에 신라에 나타나는 고려승 구덕의 경우도, 평로치청번진 멸망 이후 요동반도의 기미주들이 방기되었다고 상정​하면 해명됩니다. 이 경우 구덕은 당나라인도 아니고 발해인도 아니게 되므로, 결국 ‘고구려인’이라고 본인을 소개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로군의 남천, 평로치청번진의 명칭, 항구 관리의 흔적, 고구려 유민들의 조공 기사 등을 토대로 이 당시 요동의 북부는 아마도 발해가, 남부는 아마도 평로치청번진이 (항구들을 중심으로) 점유하고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성립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요동완충설과 요동점유설 사이에 위치한 제3의 학설이며, 이번 글에서 소개하려고 했던 세 번째 입장입니다. (뚜렷한 명칭은 없는데 저는 편의상 요동분점설 정도로 일단 부르겠습니다.)

참고로 이 설은 상당 부분 조영광 교수의 논문 「고구려 멸망 후 요동 지역의 동향 -안동도호부 및 치청 번진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에 기반한 것이며

이에 따른 지도는 위와 같이 그려진다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발해의 요동 점유에 관한 세 번째 입장(요동분점설)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원래는 여기서 끝내려고 했습니다만…

이게… 과연 그럴까요?

평로절도사 후희일은 범양[절도사]와 더불어 서로 공격한 것이 여러 해였는데, 구원이 이미 끊어지고 또 해(奚)가 침공하므로, 이에 그 군사 2만여 인을 모두 이끌고 이회선(李懷仙)을 습격하여, 그를 격파하고, 이어서 병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향했다.

平盧節度使侯希逸與范陽相攻連年, 救援既絕, 又為奚所侵, 乃悉舉其軍二萬餘人襲李懷仙, 破之, 因引兵而南.

– 『자치통감』

이희선은 당시 범양윤(范陽尹)이자 연경유수(燕京留守)였으므로, 이 기록에 따르면 평로군은 요동으로 간 것이 아니라 베이징 방면으로 진격한 것이 되며 위풍당당하게 범양군의 세력권을 가로질러서 산동까지 간 것이 됩니다.

이게 무슨 시마즈의 퇴각도 아니고 곤궁해서 대이동한 것 아니었나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하여간 자치통감대로라면 평로군은 요동을 통과한 게 아니라 서쪽으로 갔으며, 배를 탔다는 것은 천진에서 탄 것을 의미하는 것일 공산이 큽니다.

게다가 평로치청번진일 때야 독립성이 강했으니 넘어간다고 해도, 평로치청번진은 분명 당 조정에게 멸망당해 통제를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도 당나라의 기록에 요동 이야기가 전혀 안 나온다는 것은 분명 매우 이상한 부분입니다. (‘고려’의 818년 조공 기록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죠)

그러므로 평로군이 요동에 영향력이 있었는지는 사실 잘 알 수 없고, 그러니 요동반도가 그때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사실 잘 알 수 없으며, 어쩌면 평로치청번진이 망하자마자 기미주들이 발해에 복속되었을 수도 있고, 무정부 상태가 되었을 수도 있는데, 아무 사료도 없으므로, 정말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논문 한창 쓰다가 사료 하나에 아이디어가 반쯤 무너져버리는 기분은 좀 알 것도 같네요;)

따라서, 실제 역사가 어떠했는지는 위에 제시된 사료들을 보고 각자 생각해 보시는 편이 현재로서는 가장 나을 것 같습니다.

발해의 요동 점유에 대한 제 잡설은 여기까지였고요. (뭔가 혼란만 더 가중시킨 것도 같지만…)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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