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 참변은 무엇을 남겼는가: 1. 들어가며

1921년 6월 28일의 자유시 참변에는 ‘아무르 사건’, ‘흑하사변’, ‘흑룡주 사건’, ‘자유시 사건’ 등 다양한 이칭이 존재한다. 하지만 참극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기에 자유시 참변이라고 통용되며, 교과서에도 그렇게 실려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참변이며 무장 항일운동세력, 혹은 독립군에 어떠한 손실을 끼쳤는가. 이것은 또 하나의 질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사건 자체와 더불어 그 이후의 일을 살피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다.

그런고로 자유시 참변이 남긴 것들 – 사상자, 처벌, 고려혁명군, 대한의용군, 등등 – 에 대하여 짧은 견문으로나마 적어 보려 한다. 이 글이 관심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1. 들어가며

반병률은 이르쿠츠크파와 러시아 한인정책 담당자들의 잘못된 노선을 주된 원인으로 지적한다. 권희영은 상해파와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러시아 공산당 정책과의 대립으로 보았다. 임경석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간의 정치이념의 차이점을 바탕으로 상해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상해파 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군권투쟁으로 파악했다. 윤상원은 무장독립군 부대의 통합운동과정에서 빚어진 참극으로 파악하였다. 오세호는 자유시참변 직전 소비에트 러시아 정책과 한인독립운동의 관계성에서 원인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 이상의 연구 성과 속에서 자유시참변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군통수권 대립과 그에 따른 결과라고 보는 시각이 일반화되었다. 더불어 소비에트 러시아 정책과의 연관성에 무게를 두고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중 어느 쪽이 더 책임이 있는가에 대한 활발한 물음들이 지속되고 있다.

주미희 (2022)

위의 인용문에서도 드러나듯이, 자유시 참변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틀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이다. 둘은 모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이었고, 각자 고려공산당을 창당했다. 러시아공산당 극동국과 극동 공화국이 상해파의 후원자였다면, 러시아공산당 시베리아국과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는 이르쿠츠크파의 후원자였다.

처음에는 상해파가 극동 공화국의 승인을 얻어 전한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자신들의 무력 기반인 니항부대를 중심으로 대한의용군 – 소위 ‘사할린부대’ – 을 조직해 자유시에 모여든 독립군 부대들을 통합하려고 했다. 한때 자유대대조차 사할린부대로 통합되었다. 대한의용군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산하의 부대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통합 도중 소비에트의 동방 정책이 극동 공화국이나 러시아공산당이 아니라 코민테른의 책임하에 진행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결국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압박에 극동 공화국이 상해파 지원을 포기했다. 명분은 이르쿠츠크파에게로 넘어왔다.

이르쿠츠크파는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설치하고, 자신들의 무력 기반인 자유대대를 중심으로 고려혁명군을 조직해 자유시에 모여든 독립군 부대들을 통합하려고 했다. 고려혁명군은 소비에트 제5군 산하의 부대로 되어 있었다. 저명한 유격대 – ‘빨치산’ – 지휘관인 칼란다리시빌리가 고려혁명군정의회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

상해파는 여기에 저항했다. 양측 사이에 흑색선전이 오고갔고 부대 편제와 지휘체계를 놓고 이의가 이어졌다. 사할린부대는 아예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영향권을 벗어나려고 출발했다가 추격을 당해 도로 돌아오기까지 했다. 마침내 고려혁명군정의회는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29연대에 사할린부대의 무장해제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6월 28일, 29연대가 사할린부대를 포위했다. 최후통첩과 항복 권고, 협상과 회의가 이어졌지만 타결은 이제까지 그래왔듯 실패했다. 29연대 병력 1천 명과 고려혁명군 3백 명이 투입되었다. 사할린부대는 무장해제되었다.

이것이 자유시 참변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책임 소재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이루어졌고, 다른 측면에서의 해석도 제기되었다. 이제 다루어볼 것은 그 다음에 벌어진 일들이다.


참고문헌

권희영, 『한인 사회주의운동 연구』, 1999.

반병률, 「홍범도(1868-1943)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재해석」, 『국제한국사학』 1, 2013, 67-122.

반병률,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과 고려인 사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 625-661.

신주백, 「독립전쟁과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 『지식의 지평』 31, 2021, 95-109.

오세호, 「소비에트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과 초기 한인사회주의 세력의 갈등(1919~19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71, 2020, 129-164.

오세호, 「김규면의 만주·연해주 한인부대 통합 노력과 대한의용군사의회(1921~192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78, 2022, 187-226.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178, 2017, 233-263.

임경석, 『고려공산당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3.

장세윤,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의 귀환, 그 시사점과 과제」, 『역사와 현실』 121, 2021, 3-30.

주미희, 「자유시참변 1주년 논쟁에 대한 고찰」, 『역사연구』 43, 2022, 20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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