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 참변은 무엇을 남겼는가: 2. 사상자

2. 사상자

이 사안에서 가장 쟁점이 될 만한 것은 어쩌면 사상자의 추정이다.

물론 고려혁명군과 29연대의 사상자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쟁이 없다. 고려혁명군에서 1명이 사망했고, 29연대에서는 1명이 사망했거나 혹은 아무도 사망하지 않았다. 또 부상자는 9명이었다. 여기서 사망자가 1명이냐 2명이냐는 물론 사망 자체로만 보면 꽤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경미하기 때문인지 향후의 모든 쟁점에서 벗어나 있다. 관심이 집중된 것은 사할린부대의 사상자 숫자이다.

이 지점에서, 상해파가 주장하는 숫자와 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하는 숫자가 상당히 다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상반되는 정보들은 논쟁을 부른다. 그러나 연구의 수요도 여기에서 발생한다.

주장들에 따르면, 사할린부대의 사상자는 36명이라고도 하고 400명이라고도 하고 600명이라고도 한다.

600명이라는 주장에 따르면 72명은 총에 맞아 죽었고 37명은 물에 빠져 죽었고 200여 명은 도망치다가 (아마도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고 또 250여 명이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이를 합하면 물론 559명 내외이지만 도망자와 행방불명자는 추정이므로 더 많았다고 간주되어 600명이다.

400이라는 주장에 따르면 총에 맞아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과 행방불명자를 합치면 400여 명이고, 자유시에 포로로 잡혀 있는 자는 561명이며, 이르쿠츠크에 투옥된 자는 70여 명이라고 한다. 또한 공격을 당한 군대는 18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숫자만 합해 보면 약 1031명이지만 추정치이기 때문인지 차이분에 대한 설명은 없다.

36명이라는 주장에 따르면 전사자는 36명이고 장교 지휘하에 도망한 자는 30명이며 59명은 행방불명이고, 현장에서 포로로 잡한 자는 864명이다. 또 병환으로 인해 현장에 나오지 못한 사람이 19명이라 이러한 기타까지 합하면 총 1012명이라고 한다. 물론 숫자만 합해 보면 1008명이지만 기타가 더 있으므로 1012명이다.

현장 약도. 뒤편에 강이 있어 익사자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행방불명자가 과연 사상자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다시 정리해 보면 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망자의 숫자들이다. 600명설에서는 약 309명의 사망을, 36명설에서는 36명의 사망을 주장하였다. 부상자의 숫자는 알 수 없으며 400명설에서 몇 명의 사망자를 주장하는지는 불명확하다.

이렇게 보면, 위의 숫자들은 세부 사항에서조차 차이가 난다. 모두 취신하기란 불가능하다.

전사자로 말하자면 72명보다는 36명일 공산이 크다. 여기서 말하는 전사자란 도망자나 행방불명자가 아니므로 현장에 시신이 남았을 것이다. 그 시신이 수습된 규모는 36구이다.

포로의 수도 상대적으로 정확히 집계되어 있다. 포로를 수용한 측이 이르쿠츠크파이고 이 포로들을 처리한 것도 이르쿠츠크파였다. 숫자도 864명이므로 ‘850여 명’ 등보다는 훨씬 신빙성이 있다. 이렇게 보자면 36명과 864명은 단단한 수치이다. 합하면 정확히 900명이다.

반면에 도망치거나 행방불명이 되거나 강에 빠져 죽은 사람의 숫자는 물론 훨씬 더 모호하다. 그리고 강에 빠져 죽었다면 행방불명이 되기도 상대적으로 쉽다. 물론 상해파는 피해 규모를 과장하려고 노력하고, 이르쿠츠크파는 피해 규모를 축소하려고 노력하므로, 이러한 애매한 수치의 성격에 대해서는 갖가지 주장이 제기된다.

다만 범위를 설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참변 전의 인원이 몇 명이었는지를 규명하면 된다.

한때 상해파가 한인 부대 통합을 주도했을 당시, 사할린부대의 편제는 7개 중대와 3개 대대였다. 또한 1개 중대는 150명이었다. 따라서 편제상 7개 중대는 1050명에 해당한다. 물론 3개 대대는 또 다른 것이고, 상해파와 대립하던 자유대대를 강제로 편입시켜 만든 편제이므로 계산이 다소 어려운 면이 있다. 하지만 이후 이르쿠츠크파가 한인 부대 통합의 주도권을 쥔 뒤에는 어차피 3개 대대 모두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할린부대는 참변 당시 최대 1050명 가량이었을 것이며, 이보다 많았을 공산은 크지 않다.

이러한 추정은 이르쿠츠크파가 주장하는 숫자와 꽤나 부합하는 듯 보인다.

반면에 상해파는 자신들의 ‘대한의용군’이 약 1500명이었다고 주장한다. 자유시 참변을 취재한 독립신문 기고자 김경재도 대한의용군을 약 1400명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사할린부대 규모에 대한 이러한 이설들을 화해시키려는 노력이 일찍이 진행되었고, 사할린부대가 한때 1400명가량 되었으나 이후 통합 권한을 상실하여 산하 부대들이 고려혁명군으로 이탈하면서 1천여명으로 축소되었다고 보는 관점이 제기되었다(반병률, 2013).

이것은 나름대로 인정할 만한 설이다. 그리고 이렇게 놓으면 인원 추정은 보다 수월해진다. 36명이 사망하고, 864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100여 명은 병중이었거나 도망갔거나 행방불명된 것이다. 따라서 사상자가 36명보다 많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100명 이상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사상자는 ‘수십 명’ 선으로 수렴한다.

물론 수십 명이라도 36명 이외에 익사자 등의 사망자가 더 있을 수 있는 법이며, 36명이 총격으로 희생당했다는 것 자체도 대단한 참극임에는 틀림없다.

자유시 참변의 일차적인 손실은 이와 같다.


참고문헌

권희영, 『한인 사회주의운동 연구』, 1999.

반병률, 「홍범도(1868-1943)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재해석」, 『국제한국사학』 1, 2013, 67-122.

반병률,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과 고려인 사회」, 『한국근현대사연구』 67, 2013, 625-661.

신주백, 「독립전쟁과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 『지식의 지평』 31, 2021, 95-109.

오세호, 「소비에트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과 초기 한인사회주의 세력의 갈등(1919~19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71, 2020, 129-164.

오세호, 「김규면의 만주·연해주 한인부대 통합 노력과 대한의용군사의회(1921~192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78, 2022, 187-226.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178, 2017, 233-263.

임경석, 『고려공산당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3.

임경석, 「1922년 베르흐네우딘스크 대회의 결렬」, 『한국사학보』 27, 2007, 107-143.

장세윤,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의 귀환, 그 시사점과 과제」, 『역사와 현실』 121, 2021, 3-30.

주미희, 「자유시참변 1주년 논쟁에 대한 고찰」, 『역사연구』 43, 2022, 201-243.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