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 참변은 무엇을 남겼는가: 3. 처벌

3. 처벌

사실, 자유시 참변으로 인한 대규모의 손실은 참변 자체보다는 사후 처리에서 발생했다. 누구의 주장을 인용하든 참변으로 인한 사상자보다 포로가 더 많았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포로들은 사법 절차를 거쳐야 했다.

포로의 수는 864명으로 거의 확실하게 추정된다. 물론 864명이 전부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다. 간도 출신 독립군들은 이르쿠츠크파와는 본래 이해관계도 없었고 무장해제 과정에서도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예컨대 허재욱의 의군부는 응사를 포기하고, 기관총 열쇠를 뽑아서 감추었다. 이 때문에 희생이 의군부에 집중되었으나, 또한 이 사실이 인정되어 생포된 의군부는 전원 석방되었다. 이런 식으로 특별조사위원회가 364명을 무죄로 판명하고 그대로 고려혁명군에 편입시켰다.

반면 상해파의 핵심이었던 니항부대 대원들을 중심으로 한 500여 명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들이 상해파와의 관계 때문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것인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음에도 상해파와 친밀하여 재판에 회부된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어쨌든 이들 중 428명은 극동공화국 제2군단의 요청에 따라 인계되었고, 죄수부대로 편성되어 강제노역형에 처해졌다. 강제노동 장소가 우수문 벌목장이었기 때문에 우수문 노동대로 불린다.

한편 죄수부대로 편성되지 않은 72명은 주로 장교들이었는데 특별조사위원회 측은 이들을 중대범죄자로 분류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이르쿠츠크로 압송하여, 고려혁명군 내에 설치한 ‘임시고려군사혁명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하였다.

다만 중대범죄자로 분류된 것에 비해 판결은 애매했다. 일단 재판에 회부된 사람이 50명으로 줄었다. 또한 1921년 11월 27-30일에 이르러서야 판결이 내려졌다. 17명이 방면되어 군대로 복귀했고, 24명이 1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그리고 5명이 징역 1년을, 3명이 징역 2년을 받았다. 이때 선고를 받은 이들을 합하면 49명이다.

50명이 49명이 된 것은 반란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던 박그리고리가 “신임인의 보증에 의하여” 석방되었기 때문이다. 이 신임인이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이 재판에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이르쿠츠크로 온 한인 대표들이 배심원으로 동원되었다는 것과, 홍범도가 재판위원으로 참여했다는 것은 밝혀져 있다. 당시 재판위원장이었던 채동순과 또 다른 재판위원이었던 박승만은 모두 이르쿠츠크파였다. 따라서 신임인은 한인 대표나 간도 독립군 측 인사 중에서 나왔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명도 72명이 50명이 된 이유는 잘 설명해 주지 못한다. 압송 도중 탈출 사건이 있었으나 7명이 시도하여 2명은 죽고 2명은 다시 체포되었으며 3명만 탈출하였다. 따라서 총수는 67명이 되어야 하나 50명만 판결을 받았다. 아무런 선고 기록이 없는 17명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기 어렵다. 다만 단서는 있다.

1921년 11월, 상해파의 영수 이동휘는 박진순, 홍도 등과 함께 제3차 국제공산당 대회에 참석하였다. 이들은 모스크바 중앙 정부에 자유시 참변에 대해 보고하고, 이르쿠츠크파의 전횡을 성토하였다. 물론 대회에 참석 중이던 이르쿠츠크파의 한명세는 이에 반발하였다.

성재 이동휘

그러자 검사위원회가 조직되어 11월 15일 ‘한국문제결정서’, 이른바 ’11월 결정서’가 도출되었다. 이 결정서는 고려혁명군사법원의 권한을 부인했다. 대신에 ‘자유시사변조사위원회’를 설립하여 진상을 조사하고, 자유시 참변과 관련해 투옥된 80여 명에 대한 석방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이 ’80여 명’이란 위의 72명에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에 의해 체포된 한인부 요인 5명가량을 더한 숫자로 보인다.

11월 15일에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으므로, 모스크바와 이르쿠츠크의 거리를 감안하더라도 11월 27-30일간의 판결은 사실상 월권이었다. 재판이 언제 중단되든 저촉될 것이 없었다. 따라서 누락된 17명에 대한 판결은 애초에 진행조차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1921년 12월 2일이 되면 이미 이동휘와 홍도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11월 결정서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표성을 모두 부인하고, 양 파가 연합하여 ‘고려공산당 임시중앙간부’를 조직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간부진은 각 파에서 4인씩 총 8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이동휘와 홍도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할 시점에는 8명의 위원 중 단 2명만이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고, 나머지 6명은 선임 중이거나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2명의 위원은 바로 이동휘와 홍도였다.

이들은 자신의 자격을 활용하여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와 교섭하였다. 상해파는 수감 중인 한인부 인사들 및 사할린부대 대원들의 석방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협상 대상은 코민테른 극동비서부 고려국이였다. 이르쿠츠크파의 한명세가 거기 있었다. 12월 13일, 14일, 21일 세 차례에 걸쳐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특히 12월 14일에는 간도독립군 지도자 27명 –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 지청천 등 – 이 상해파의 김동한에게 자유시 참변 관련 협상의 전권을 위임하였다.

그런데 과연 이 중대한 협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자유시사변진상조사위원회가 조직되기는 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자유시 사변의 진상’은 이후의 여러 대회에서도 조사가 기대되었지만 하나같이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 당시라고 해서 조사가 가능했을 공산은 크지 않다. 2인 위원만으로는 협상력이나 권위가 부족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후 1922년 3월이 되면 양 파에서 4인씩 8명의 후보위원이 선임된다. 정식위원은 그때도 이동휘와 홍도뿐이었지만, 형평성을 위해 각 파에서 위원 2명씩을 대표로 삼아 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체제로 또다시 7번의 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이때도 자유시 참변 관련 안건이나 관련자들의 석방에 관한 안건이 가결되었다는 정보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미해결 안건 가운데 이와 관련된 안건이 있었다는 정보도 나타나지 않는다.

종래까지의 재판에 의하면 당시에는 사할린부대 출신 8명이 복역 중이어야 하고, 또 17명은 선고를 기다리는 중이어야 한다. 물론 이 판결의 효력은 11월 결정서에서 부정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판결이 나오기 위해서는 진상 조사가 이루어져야 했다. 자유시 참변의 무게와 영향력을 고려할 때 사할린부대 출신 죄수들의 석방 논의가 전혀 없었을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이르쿠츠크파의 동의 없이 그러한 석방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낮다.

당시 상해파 인사 중 이르쿠츠크파가 석방한 사람은 11월 결정서에 직접적으로 언급된 박애 및 함께 체포되었었던 계봉우, 김진, 장도정 정도뿐이다. 이들은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에서 근무하며 상해파의 독립군 통합을 주도하다가 투옥된 사람들이다. 그나마 같이 체포된 박창은이 석방되었는지의 여부도 알기 어렵다. 상황이 이러니 사할린부대 출신의 25명에 대해서는 더욱 정보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반드시 8명이 징역을 살고 17명이 어딘가에 구금되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11월 결정서와 양 파의 연합을 계기로 이들이 석방되었을 수도 있다. 혹은 일부만이라도 방면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불확실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1921년 6월 28일부터 11월 27-30일까지 5개월가량 약 70명에 달하는 사할린부대 인원들이 체포 상태였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들은 분명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1922년 1월에야 풀려나는 것으로 여겨지는 우수문 노동대에 이르러서는 그 고초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자유시 참변의 이차적인 손실은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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