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 참변은 무엇을 남겼는가: 4. 고려혁명군

4. 고려혁명군

자유시 참변은 독립군 통합의 실패를 야기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현대 학자들의 평가도 그러하다. 니항부대를 비롯한 사할린부대 대원들 상당수가 고려혁명군에 합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르쿠츠크파는 자신들이 독립군 통합을 완수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유시 참변 이후 고려혁명군은 원래 계획대로 조선 국경까지 진출하고자 했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는 것이 목표였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당초 수립한 고려혁명군의 운용 계획도 중국 영토를 통과해 행군한 뒤 조선-중국 국경지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1921년 7월 5일,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는 고려혁명군에게 만주 출동을 정지하고 이르쿠츠크로 회군하라는 전보를 발신했다. 당시 극동 공화국과 일제는 8월 26일의 ‘대련회담’을 앞두고 있었는데, 여기서 상호 적대행위의 금지를 논의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를 위하여 7월에 일본과 극동 공화국 간 ‘일러의정서(日露議定書)’가 잠정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극동 공화국 영내에는 조선인 무장부대가 주둔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회군 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이러한 지령에 고려혁명군 병사들은 대다수가 낙담했다. 이르쿠츠크파의 기록에서도 ‘다수한 군인’이 회군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탈영자도 속출했다. 그러나 고려혁명군은 결국 8월 5일부로 이르쿠츠크로 발길을 돌렸다. 이로써 극동 공화국의 관할구역인 자바이칼주와 아무르주 일대에는 더 이상 한인 무장부대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8월 말에 이르쿠츠크로 돌아온 고려혁명군은 러시아 적군 제5군 소속의 ‘조선여단’으로 개편되어 1개 여단 산하에 2개 연대와 특립대대, 경호대를 두었다. 병력은 한인 1745명, 러시아인 371명, 중국인 314명으로 총 2400여 명이었다. 개편과 함께 군대의 성격 변화도 불가피했다. 회군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전투부대로 기능하기 어려웠다. 이르쿠츠크에 주둔하며 군사교육과 정치교육을 받는 것이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고려혁명군은 사실상 학교로 변모했다. 유격투쟁을 추구하던 칼란다리시빌리는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고 10월 9일부로 여단장직을 사임했다. 칼란다리시빌리가 부하들을 이끌고 떠나자 고려혁명군정의회도 해산되었다. 대신에 정치부가 조직되었다. 여단장을 비롯한 사령부는 이르쿠츠크파로 완전히 매워졌다. 이러한 변화를 거치며 병력은 300여 명이 줄어 2100명이 되었다.

이후 10월 28일, 여단 내에 사관학교가 설치되었다. 교장 지청천을 비롯해 17명의 장교가 교관을 맡았다. 일부 교과목은 제5군단에서 러시아 교관을 초빙해 수업했다. 6개월 과정으로 200명이 선발되어 교육을 받았다. 한편 보통학교도 4개 설치되었다. 설치 목적은 문맹 퇴치와 일반병에 대한 정치교육 강화였다. 총 6학급에서 711명이 교육을 받았다. 단 2달간의 교육으로 여단 내 문맹자가 사라졌다. 물론 이후에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정치교육은 계속되었다.

백산 지청천

이러한 사실은 고려혁명군이 점차 항일투쟁보다는 사회주의를 추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1921년 11월 말에 이미 전체 2100명의 병력 중 255명이 공산당원이었고, 또 421명은 후보당원이었다. ‘교육’이 진행됨에 따라 더 늘어났을 것이다. 물론 이들에게 항일투쟁과 사회주의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사회주의 교육이 항일투쟁에 우선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예컨대 고려혁명군의 사령부는 극동 지역으로 이동해 전투를 벌이는 것을 반대했다. 당시 러시아 적군 제5군은 고려혁명군을 적백내전에 활용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1922년 3월 5일부로 고려혁명군 정치부를 해산하고, 여단을 독립연대로 재편해 극동 지역으로 진출시키는 것이 골자였다. 그때 극동 지역에서는 이미 한인 유격대들이 일제의 지원을 받는 러시아 백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2월 27일, 제5군은 고려혁명군을 연대로 재편시켰다. 병력은 1953명이었다.

그런데 3월 9일, 고려혁명군 사령부는 군대의 이동을 중지시켰다. 극동 공화국과 협의해 보니 아직 대련회담이 진행 중이더라는 것이었다. 예전과 같은 이유였다. 그러나 이것은 핑계일 공산이 크다. 이르쿠츠크파에게 있어서 극동 이동은 항일투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는 11월 결정서와 함께 재기한 상해파가 다시 한 번 한인부대 통합을 시도하던 때였고, 극동에는 상해파 인사들이 주도하는 유격대들이 많았다. 고려혁명군이 극동으로 이동하면 이들과 통합 부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군권이 상해파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사령부의 조치에는 반발이 따랐다. 반발 세력이 친 상해파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항일투쟁을 원했기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두 가지는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상해파는 이들과 접촉해 기존 사령부를 항명 혐의로 퇴출시키고, 대신에 채영, 박밀양, 이다물을 지도부로 등극시키려고 시도했다. 채영과 이다물 등은 이에 호응하여 사령부 위원들이 극동 이동을 막고 있다며 비판했다. 또 황하일을 앞세워 조직 재편을 시도했다. 이들은 실제로 제5군과 협의하여 30명의 대원들을 극동 지역으로 파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고려혁명군 사령부는 이들을 강경하게 진압했다. 3월 18일, 채영과 이다물을 비롯한 16명의 장교는 모두 체포되었다. 4월 5일에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수감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혁명군에 대한 이르쿠츠크파의 장악력이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고려혁명군은 결국 극동 지역으로 출격하지 못했다.

이후 4월 16일에는 중앙으로부터 1개 연대의 병력이 1천 명을 초과할 수 없다는 지시가 내려졌다. 보급품도 1천명분만 지급되었다. 이에 연대는 부대원들을 대규모로 제대시켰다. 러시아인과 중국인을 거쳐 한인도 대상이 되어 노병, 환자, 전투 부적합자 등이 제대 처리되었다. 6월 말이 되면 남은 병력은 1202명밖에 없었다. 제대한 병사들은 대부분 연해주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상해파는 고려혁명군을 극동으로 이동시키려고 시도했다. 이동휘가 6월 6일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에 고려혁명군의 이만역 파견을 요청한 것이 대표적이다. 상해파는 고려혁명군이 이러한 목적에 활용되지 못한다면 해산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참전은 실행되지 않았다. 대신에 해산이 실행되었다. 8월 15일 이후, 고려혁명군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는다. 장교와 병사 중 70여 명은 사관학교 입학 대상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로 떠났고, 노약자 500여 명은 제대해 흩어졌으며, 남은 600여 명의 인원들은 고려특립연대로 재조직되었다.

물론 고려특립연대에 대해서는 이들이 전쟁에 동원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확실히 고려특립연대가 조직 이후 이르쿠츠크를 떠나 극동 지역으로 이동해 주둔하였다는 기록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주둔을 증명할 뿐 참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들이 극동에 도착했을 1922년 9월경에는 전쟁도 막바지였다. 러시아 적군의 승리는 명약관화했고, 한때 전투에 참전했던 한인 유격대들도 이때쯤에는 전선이 아니라 치안 유지 업무에 투입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특립연대가 전투에 동원되었을 공산은 작다.

결론적으로 약 1년에 달하는 고려혁명군의 훈련은 러시아 백군 또는 일본군과의 전투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 점에서 훈련의 성과는 항일 무장투쟁에는 별로 기여하지 못한 반면, 사회주의 의식 고취와 향후의 소비에트 건설에만 기여하였다. 물론 자유시 참변 없이 독립군이 통합되었다고 해도 반드시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적백내전 참전에 적극적이었던 상해파의 지향을 고려하면, 적어도 고려혁명군처럼 1년 동안 교육에만 집중하며 후방에 주둔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자유시 참변으로 인한 또 다른 손실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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