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 참변은 무엇을 남겼는가: 5. 대한의용군

5. 대한의용군

자유시 참변의 승자는 이르쿠츠크파였다. 그러나 상해파가 전멸한 것은 아니었다. 참변 도중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고, 다른 지역으로 파견을 나가 있던 사람도 있었다. 특히 블라고베셴스크에서 군수품 지원 업무를 맡고 있던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군사지도부는 수감을 면할 수 있었다. 고려혁명군정의회가 한때 이들을 체포했으나, 곧 블라고베셴스크 수비대가 이들을 석방시켜 보호하였기 때문이다. 블라고베셴스크 당국은 코민테른의 명령이나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명령 없이는 이들을 인계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체포 과정에서 탈취당한 서류들과 3만 루블까지 되찾아 주었다.

구사일생한 상해파 고려공산당 군사위원들은 곧 이르쿠크츠파의 만행과 참변 사실을 알리기 위해 모스크바행을 계획했다. 하지만 이르쿠츠크파의 경계가 삼엄하여 겨우 우편만 보낼 수 있었다. 다시 블라고베셴스크로 돌아온 이들은 극동 공화국 관할이 아닌 곳에서 다시 한 번 한인 통합부대를 조직해 항일투쟁을 이어나가고자 했다. 그래서 군사위원 11인이 각지로 파견되어 농촌에 흩어져 있던 구 사할린부대 대원들을 이만으로 불러모았다. 또한 이만에는 참변 이후 산림에 숨어 있다가 블라고베셴스크로 합류한 이용이 파견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자유시 참변 당시 무장해제를 피해 도주했던 군인 중 100여 명이 다시 이만으로 집결하였다. 수십 명의 부하들을 인솔해 탈출을 주도했던 박일리야 역시 이만으로 합류했다. 당시 이만은 극동 공화국과 일본군 간 협정에 따라 설정된 군사 분계 지역이었기 때문에, 극동 공화국 관할 지역도 아니었고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시야에서도 비껴나 있었다. 게다가 힘을 합칠 만한 독립군 세력도 주둔하고 있었다. 바로 군비단이었다.

군비단은 곧 ‘대한독립군비단’으로, 간도 장백현에서 조직된 무장 독립운동 단체였다. 하지만 무기를 구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한 일본과 중국 관헌들의 압박도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군비단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전 중으로 무기 구입이 용이하고 또 독립군을 지원한다고 알려져 있던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1921년 3월부터 11월까지 9회에 걸쳐 이동한 연인원은 500명에 달했다. 다만 장교가 부족하여 5회차 이동 당시에는 김홍일을 초빙해 병력 인솔을 맡기기도 했다. 목적지는 자유시였다.

일서 김홍일

그런데 김홍일 등은 5월 10일 이만에서 자유시의 분위기가 험악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홀로 자유시를 시찰하고 돌아온 김홍일이 현지 상황을 설명하자, 군비단은 자유시행을 포기하고 이만에서 무장투쟁을 도모하기로 결정했다. 7월 13일, 군비단은 이만의 한인사회와 연계하여 고려혁명의용군으로 조직을 재편하였다. 그리고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과 연결을 시도했다. 구 사할린부대 대원들과 상해파 군사지도자들이 이만에 온 것은 바로 이러한 때였다.

군비단은 이들을 환영했다. 사관양성사업을 위해 필요한 군사 전문가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간도의 김좌진 부대에서 장교를 초빙해 사관양성을 맡기려고 했으나, 김좌진 측에서 자신들에게 군비단의 전권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여 교섭이 결렬되었다. 반면에 때마침 나타난 상해파 군사지도자들은 군비단의 요청을 아무런 조건 없이 선뜻 받아들였다. 이로써 구 사할린부대의 잔존 세력이 군비단과 결합하여 9월 15일부로 대한의용군사의회와 대한의용군이 출범하였다. 이들은 그 뒤로도 흔히 군비단이라고 불렸으나, 어떤 측면에서는 구 대한의용군의 부활이기도 했다.

대한의용군은 곧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6개월 과정으로 50명의 생도를 교육하였다. 교재로는 김홍일이 중국군관학교 고재를 번역한 것을 사용하였다. 대한의용군 사령관은 이용이 맡았고, 병력은 3개 중대 357명으로 구성되었다. 11월 12일, 대한의용군은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 연해주사령부와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연해주 내전 참전을 결정하였다. 무기와 탄약은 인민혁명군이 지급하기로 했다. 이후 12월이 되자 인민혁명군 제2군 제6연대가 대한의용군에게 합류를 요청했다. 이미 11월 14일부터 백군의 공세가 시작된 상황이었다.

대한의용군은 12월 2일 출정했다. 모스크바에서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인민혁명군은 수세였다. 대한의용군은 이만-비낀 퇴각전, 비낀-하바롭스크 퇴각전, 하바롭스크-인 퇴각전 등에서 러시아 적군의 퇴각을 엄호하는 지연전을 수행했다. 특히 대한의용군 제2중대는 12월 4일 이만역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1500명 이상의 러시아 백군 중 600여 명을 사살하고 200여 명을 부상시키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대한의용군 제2중대의 생존자도 단 3명뿐이었다.

그런데 인역까지 퇴각한 뒤에는 더 물러날 수가 없었다. 이에 12월 24일 인역을 사수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인민혁명군과 대한의용군은 하루 동안 세 차례의 공격을 막아낸 끝에 백군을 격퇴했다. 이 전투 이후 강추위가 닥쳐왔고, 1922년 1월 한 달간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대한의용군은 이 기간을 이용해 손실된 전력 보충에 나섰다. 극동 공화국과의 교섭이 성공하여, 자유시 참변 이후 우수문 노동대로 끌려갔던 구 사할린부대 대원들이 마침내 석방되었다. 이들은 곧바로 대한의용군에 합류했다. 또한 아무르주와 연해주 지역의 한인 유격대들이 대한의용군을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이러한 통합 노력은 이후 고려혁명군에까지 닿았다. 다만 전편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려혁명군을 통합하는 것은 끝내 실패하였다.

이후 2월 10일, 대한의용군은 볼로차예프카 전투에 참전하여 최선봉을 맡았다. 당시 대한의용군은 연해주 일대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한인 유격대였다. 전투는 2월 12일이 되어서야 끝났고, 백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도주했다. 대한의용군이 소속되어 있던 제6연대가 적기훈장을 받았다. 볼로차예프카 전투 이후 연해주 내전의 전세는 급격히 러시아 적군에게로 기울었다. 2월 14일에 이만이, 28일에는 하바롭스크가 탈환되었다.

볼로차예프카 전투 이후 대한의용군은 주 전선을 떠나 점령지 경비 임무를 맡았다. 러시아 적군은 하바롭스크 탈환 이후 대한의용군을 특립보병대대로 재편해 정규군으로 전환시켰다. 대대장에 이용, 부대대장은 김홍일이 임명되었다. 병력은 3개 중대와 1개 기관총 중대, 특무대 1개 중대를 더해 총 8백여 명에 달했다. 그런데 이러한 재편은 아무르주의 다른 유격대 부대원들까지 흡수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박 모이세이를 비롯한 인물들이 새로 군정위원으로 임명되였다.

박 모이세이의 등장은 기존의 지휘부에 불안을 심어주었다. 이들은 대부분 상해파였고, 자유시 참변 당시 도주했던 인물도 섞여 있었다. 그래서 박 모이세이 등이 이르쿠츠크파의 사주를 받고 자신들을 체포 또는 암살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박 모이세이는 실제로 이용을 축출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3월 초부터 특립보병대대의 지도부가 예전 자유시에서 ‘봉기’를 일으켰던 자들이라는 투서가 인민혁명군에 날아들기 시작했다. 이용 등이 체포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군심은 어수선해졌다.

결국 이용 등은 이만역 전투 전사자들의 장례를 치른다며 이만으로 떠났다. 장례는 사실상 핑계였고, 더 이상 하바롭스크 일대에 머물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 주효했다. 전사자들의 장례를 지내준 이용은 곧 대대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리고 극동 공화국에 특립보병대대를 경비대로 여러 지역에 흩어 놓지 말고 집결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집결해 훈련하며 장차 독립전쟁을 도모하는 것이 원래의 협정 내용이었다는 것이었다. 극동 공화국은 이를 승낙했지만 실제로는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

이용은 또한 곧 이르쿠츠크파가 특립보병대대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우수문 노동병으로 송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위험을 피해 이만으로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이용은 제1중대를 이끌고 이만에서 대한의용군을 재조직했다. 반면 2중대와 3중대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5월 6일경이 되면 이용의 말이 입증된다. 극동 공화국에 의해 2중대와 3중대가 무장해제당해 일부는 도망치고 일부는 우수문 노동대로 송치된 것이다. 이때 송치된 이들은 8월 7일에야 풀려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김홍일 등은 본래 이르쿠츠크파 또는 상해파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다. 그래서 김홍일은 이용이 떠난 이후에도 5백 리에 달하는 넓은 지역의 수비대를 이끄는 사령관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5월 1일에는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머지않아 김홍일 역시 5월 15일 인민혁명군에 ‘사면청원서’를 제출하여 이용과 동일한 요구를 했다. 원래의 약속대로 한인 부대를 한 곳에 집결시켜 대규모 항일군단을 조직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김홍일은 자신의 요구가 거듭 무시되자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몇 차례의 회의를 거쳐 9월 1일부로 연해주 한인빨치산부대 혁명군사소비에트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한인 유격대 전체를 통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으며, 이르쿠츠크파가 주도하였다. 이 때문에 이만에 있던 대한의용군은 지도부에서 제외되었다. 다만 이용은 북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대한의용군은 자유시 참변 당시의 폐해를 상기하여 크게 반발하지 않고 순순히 혁명군사소비에트 산하로 들어갔다. 이때의 통합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각 지역의 한인 유격대들이 모두 ‘연해주 고려혁명군’으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0월 25일 러시아 적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했다. 그리고 11월 2일 연해주 내전은 종료되었다. 이제 한인 유격대들은 무장 상태일 필요가 없었다. 또한 일본군도 10월 24일 철병 조약 체결 이래 계속해서 한인 유격대들을 무장해제시키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종전 직후 무장해제 및 해산 명령이 내려왔다. 이에 따라 대한의용군은 12월에 해산했고, 대부분의 대원들은 연해주에 정착했다. 다만 지도부는 중국으로 떠나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면, 자유시 참변은 대한의용군의 성장에 있어 하나의 굴레로 작용한 듯하다. 물론 그러한 굴레가 없었더라도 연해주 내전의 종결이라는 더 커다란 장벽이 있었으므로, 과연 러시아에서 항일대군단을 결성하여 독립전쟁을 벌인다는 구상이 가능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통합의 시점은 더 빨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결정적인 변수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것이 자유시 참변으로 인한 또 하나의 영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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