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 참변은 무엇을 남겼는가: 6. 나가며

6. 나가며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과 응원을 얻으려 했던 상해파와 러시아 내의 공산주의 한 부분이 되려 했던 러시아화된 한인들인 이르쿠츠크파 간에는 상당한 간격이 존재했다. 동아시아 민족해방운동이 코민테른 하에서 작동되면서 볼셰비즘의 보편화라는 코민테른의 정책과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코민테른 담당자들의 이견이 고스란히 투영되는 문제점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 자유시참변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간의 정치노선의 충돌 결과이자, 상해파와 소비에트 러시아 및 코민테른 정책과의 대립의 산물로 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주미희 (2022)

자유시 참변은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수형자를 발생시켰고, 고려혁명군을 발생시켰고, 대한의용군을 발생시켰다. 그리고 넓게 보면 그 뒤에도 이어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갈등이나 여러 독립운동사의 굴곡들이 자유시 참변과 관련을 맺고 있다. 별로 생산적인 유산들은 아니다.

물론 거시적인 상황을 놓고 보자면, 러시아로 들어가서 항일대군단을 조직해 훈련하다가 적절한 시기에 해산을 피해 다시 간도로 넘어가기까지 하는 것은 자유시 참변이 없었더라도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수십 명의 사상자와 수백 명의 수형자를 만들어낸 것은 자유시 참변의 분명한 악영향이지만, 자유시 참변이 없었다고 하여 반드시 무장해제의 운명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볼 수만도 없다.

그런 관점에서는 확실히 자유시 참변이 어떤 결정적인 변곡점은 아니었다.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당시 코민테른의 입장은 간도 독립군들의 입장, 하다못해 상해파의 입장과도 간극이 있었다. 그 간극은 이후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동화된 것에 가까웠다. 동화되지 않고 협력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래서 그것이 최선이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는 없다. 자유시 참변은 간도 독립군들에게도, 상해파에게도, 이르쿠츠크파에게도, 심지어 코민테른에게도 최선은 아니었다. 각 주체가 이용하고자 했던 유무형의 역량이 손실되었기 때문이다. 참변이 한인 사회에 던진 파문도 막대했고, 홍범도를 위시한 독립군의 노장들도 큰 고통과 충격을 겪어야 했다.

여천 홍범도

그러므로, 자유시 참변은 비극이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비극인지는 지금까지의 글들이 조금이나마 설명해 주고 있는 것 같다. 나머지에 대해서는 각자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본 연재에서 참고한 문헌들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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