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건축의 대표작, 페르가몬 제단. 측면에는 기간토마키(올림포스 신족과 기간테스의 싸움)가 부조되어 있다.
1. 아탈로스 왕조 페르가몬 왕국(BC 282~129)
원래 페르가몬의 왕가의 시조가 되는 필레타이로스(BC 282~263)는 리시마코스 왕조 트라키아의 페르가몬 방면 장군이었다. 그러나 필레타이로스는 셀레우코스 제국과 리시마코스 왕국간에 전쟁이 발발하자 셀레우코스 제국 측으로 반란을 일으켜 결국 리시마코스가 죽게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필레타이로스는 아직 정식으로 왕을 칭하지는 않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제후 행세를 함으로써 셀레우코스 제국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착실하게 자신의 왕국의 기반을 닦았고, 그 일환으로 그리스 여러나라에 사절들을 보내 자신이 페르가몬의 지배자임을 널리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에 만족하면서 계속 그들에게 충성했던 것 같다. 그의 치세에서는 독립을 향한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레타이로스 자신은 아들이 없었기에, 동생인 에우메네스의 아들인 에우메네스를 양자로 들여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가 바로 아탈로스 왕조의 제 2대 왕인 에우메네스 1세(BC 263~241)이다. 에우메네스 1세는 필레타이로스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제후이자 장군으로서 삶을 마감한 것과는 달리,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안티오코스 1세를 패배시킴으로써 독립을 달성하였다. 그의 갑작스런 반란은 아마도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의 책략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전에 쓰던 셀레우코스 제국의 주화를 없애고 새로 필레타이로스의 주화를 만들어 왕국 내에 보급시켰다.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의 반란이 성공하자 이제 페르가몬을 위협하는 세력은 없었다. 셀레우코스 제국과 이집트가 싸우는 동안 페르가몬 왕국은 착실하게 국력을 신장시켰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 내에서도 끊임없이 반란을 선동하여 그들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국력이 약화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BC 260년 경이 되자 마케도니아를 휩쓸었던 갈리아인들이 페르가몬 왕국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우메네스는 그들에게 공물을 주어 현재의 갈라티아 지방으로 물러나게 했다. 에우메네스 역시 아들이 없어 사촌인 아탈로스를 후계자로 삼아 페르가몬의 왕위를 물려주게 했다.
아탈로스 1세 소테르(BC 241~197)는 페르가몬으로부터 공물을 갈취해가는데 맛을 들인 갈리아인을 중요한 전투에서 격파함으로써 구원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공격하여 에게 해 연안과 소아시아 내륙의 일부 영토를 획득했으며,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5세와도 싸웠다. 마케도니와의 전쟁은 만만치 않아 처음에는 페르가몬 왕국도 잘 싸웠으나 결국에는 필리포스 5세의 군세에 페르가몬은 압도당하여 한때는 페르가몬이 마케도니아군에게 포위당한 적도 있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인데, 필리포스 5세의 대담한 작전은 사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 밀약을 맺고 서로 후방을 보호해주기로 했으며, 나아가 두 명의 팽창주의 군주가 페르가몬과 이집트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던 것이었다. 이를 알게 된 페르가몬은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로마는 미온적이었으나, 제 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이들과 확실한 우호 동맹을 맺게 되었다. 이후 페르가몬 왕국은 로마의 충실한 동맹으로 남게 된다. BC 198년 키노스케팔라이에서 필리포스 5세가 패배함으로써 페르가몬은 구원받을 수 있었다. 필리포스 5세의 패배를 확인한 아탈로스 1세는 바로 급한 근심은 덜었다고 생각했는지 이듬해 편안히 눈을 감았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장남인 에우메네스 2세(BC 197~160)였다. 마케도니아 왕국으로부터의 위협은 사라졌으나 아직 셀레우코스 제국이 팽창주의 정책을 버리지 않고 있어 큰 위협은 항상 존재했다. 페르가몬은 다시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항하여 로마와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BC 190년 로마가 마그네시아에서 안티오코스 3세에게 대승을 거두자 페르가몬은 마침내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에우메네스 2세의 치세에 그리 큰 특징은 없었으나 이 마그네시아 전투의 결과로 페르가몬은 아직 이 지역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던 로마에게서 타우루스 산맥 서쪽의 아나톨리아 반도를 모두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이제 셀레우코스 제국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만한 국력을 갖추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에우메네스 2세는 이 지방을 탈환하기 위해 BC 182년에 재차 침공해 온 셀레우코스 제국군을 물리치고 왕국을 잘 유지시킨 뒤, 그의 동생인 아탈로스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아탈로스 2세 필라델포스. 페르가몬을 알렉산드리아에 필적하는 문화 중심지로 만들었다.
아탈로스 2세 필라델포스(BC 160~138)는 그렇게 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에우메네스 치하에서 마그네시아 전투 때 셀레우코스 제국군을 무찌른 것은 그의 공이 컸다. 아탈로스 2세는 왕위에 오른 뒤에 로마군이 주도한 갈라티아 원정에 따라갔으며, 문화인으로써 로마에 사절을 지속적으로 파견하여 원로원의 존경을 이끌어 내 로마인의 환심을 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맞서기 위해 페르가몬에도 대도서관과 극장 등 문화시설을 건립했다. 대도서관은 매우 발전하였으며, 양피지를 뜻하는 영어 단어를 유래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소아시아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알렉산드로스 발라스를 후원하여 결국 그가 정통 왕가의 데메트리오스 1세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새로운 자수법을 개발하였으며, 왕국의 영토를 넓히고 요지에 아탈레이아와 필라델피아(두 도시 모두 당시보다는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를 건설하였다. 그는 문예와 학술, 예술의 후원자로서도 당대에 유명하였다. 통치 말년에는 장군 필로포이멘에게 의존하며 지냈다. 아탈로스 2세의 뒤를 이은 것은 에우메네스 2세의 장남 아탈로스 3세였다. 아탈로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 필로메토르(BC 138~133)는 왕위에 별로 뜻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학자로서의 삶을 더 좋아했으며, 약학, 식물학, 원예에 대해 매우 깊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던 당대의 대학자로 유명했다. 그는 아들이 없이 죽었으며, 죽을 때 자신의 왕국을 로마에 유산으로 남겼다. 그러나 여기에 반발한 인물이 있었으니, 에우메네스 3세를 자처한 아리스토니코스라는 인물이다. 그는 아탈로스 3세의 동생임을 자처했으며 자신에게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로마의 지배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로마의 집정관인 마르쿠스 페르페르나에게 패배하여 붙잡혔으며, 개선식에 끌려다닌 후 처형되었다. 이로써 아탈로스 왕조 페르가몬 왕국은 멸망하였다. 그리고 그 영토는 대부분이 로마에게 할당되었고, 카파도키아 왕국, 비티니아 왕국에도 약간의 영토가 할양되었다.
박트리아 왕국의 최대 영역. 한 때 파르티아와 마우리아를 상대로 선전했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멸망한다.
2. 박트리아 왕국(BC 246~130)
* 이 왕국의 재위 연도는 모두 ‘대략’적인 연도이다. 이는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왕들의 재위 연도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박트리아 왕국은 특이하게 그리스계 왕국이면서 중앙아시아에 위치해 유목민적 특색을 강하게 띠고 있었으며, 가장 특이한 점은 왕들이 불교 신봉자였다는 점이다. 그리스적 특색은 왕들의 이름에서나 찾아볼 수 있고 중앙아시아-인도풍과 페르시아적 특색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원래 이 지역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토였으며,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의 동방 순수(巡狩)로 이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한 바 있다. 또, 이 왕국은 한 왕가가 지속성을 가지고 이어내려오지 못하고 여러 왕가로 대체되면서 왕국이 유지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박트리아 왕국의 초대 왕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박트리아 총독이었던 디오도토스로, 그가 바로 디오도토스 1세(BC 246~240)가 되었다.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권을 부정하고 자신이 왕임을 선포했다. 이 때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1세는 이집트와의 전쟁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디오도토스 1세의 아들인 디오도토스 2세(BC 240~223)이 왕위를 계승했다. 디오도토스 2세는 자신의 지배권을 확고히 했고 파르티아 왕국의 창시자인 아르사케스와 평화 조약을 맺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재위 17년만에 부하였던 에우티데모스 1세에게 살해당한다. 이로써 디오도토스 왕조는 몰락했다.
에우티데모스 1세(BC 223~200)는 찬탈자라는 자신의 위치를 만회하기 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전쟁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BC 208년, 안티오코스 3세 대왕이 박트리아를 침공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그는 만 명이 넘는 기병을 동원하고서도 안티오코스 대왕에게 대패하였으며, 안티오코스의 집요한 추격을 피해 수도인 박트라로 필사적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박트라는 요새화된 도시로서 안티오코스의 포위공격을 2년동안이나 견뎌내었다. 그 동안 나라는 말할 수도 없이 피폐화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빨리 이곳에서의 전쟁을 끝내고 지중해로 돌아가고 싶었던 안티오코스는 에우티데모스에게 ‘반역자 디오도토스 가문을 처단한 공으로 박트리아의 제후로 인정해준다’는 교서를 주고 서로 화해하였다. 화친을 협상할 때 에우티데모스는 혼인 동맹을 제안함으로써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안티오코스의 딸과 결혼했고 이로써 그의 위상은 더 높아졌다. 셀레우코스 제국군이 철수하자 그는 국가의 재건을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그는 190년경에, 혹은 더 일찍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뒤는 아들인 데메트리오스가 계승하였다. 데메트리오스 1세 아니케토스(BC 200~185)는 마우리아 제국이 다스리고 있는 북서부 인도를 침공했다. 마우리아 제국군은 박트리아의 그리스-중앙아시아의 혼성 군대에 힘없이 격파당했으며, 셀레우코스 제국이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반란군의 세력에 아라코시아를 잃자 그곳으로 쳐들어가 드란기니아까지 병합하였다. 마우리아 제국은 그 후 얼마 못가 숭가 왕조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힌두쿠시 너머에 큰 영토를 만들고 대제국을 건설한 뒤 데메트리오스 1세는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인도인이 서로 융합된 하나의 세계제국의 이상을 추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힌두쿠시 산맥을 경계로 북쪽의 박트리아, 남쪽의 인도 왕국은 점차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된다. 뒤를 이은 것은 에우티데모스 2세(BC 180)였는데, 그는 곧 암살당했고, 다음으로는 안티마코스 1세(BC 185~170)이었다. 그는 반란을 일으킨 에우크라티데스에게 패배하여 죽음으로써 에우티데모스 왕조 박트리아는 끝장이 났다. 그러나 에우티데모스 왕조는 힌두쿠시 남쪽으로 피신하여 탁실라를 수도로 인도 왕국을 수립하게 된다.
에우크라티데스 1세. 파르티아, 인디아에 원정하여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후에 인도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한다.
이리하여 에우크라티데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에우크라티데스 1세(BC 170~145)는 가장 유명한 박트리아 왕 중 한 명인데, 인도로 도주한 에우티데모스 왕조를 추격하여 힌두쿠시 산맥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여 박트라로 쫓겨나고 말았다. 일설에는 에우크라티데스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황족이라는 설이 있으나 매우 의심스럽다. 그가 출신 성분이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확실한 것은 그가 그리스계의 혈통이 강한 집안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이란 고원의 지배자가 된 파르티아의 왕인 미트리다테스 1세와 싸웠는데, 그가 승리하여 잠시동안 파르티아와 인디아 왕국을 지배하에 둔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아들들과 반목했던 것 같다. 에우크라티데스 1세는 후에 에우티데모스 왕가의 아폴로도토스에게 BC 145년에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것은 공동왕으로 에우크라티데스 2세(BC 145~140)와 헬리오클레스(BC 145~130)인데, 에우크라티데스 2세가 헬리오클레스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보인다. 헬리오클레스는 그 후에도 10년동안 권좌를 유지했으나, 대월지의 침입을 받아 왕좌를 빼앗김으로서 박트리아 왕국은 멸망하였다.
에우티데모스 왕조는 인도 반도 북서부에서 여전히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앞서 등장한 데메트리오스 1세 아니케토스(BC 200~185) 시절에 이미 확립된 패권은 아가토클레스(BC 190~180)와 판탈레온(BC 190~185)의 통치를 거쳐 안티마코스 1세(BC 185~170)로 이어졌다. 안티마코스 1세의 사망으로 에우티데모스 왕조는 박트리아를 상실했으나 대신 인도 왕국을 지킬 수 있었다. 메난드로스 1세 소테르(BC 155~130)의 시대에 인도 왕국은 전성기를 맞이해, 펀잡 전지역과 아라코시아, 간다라 등을 포함하는 큰 왕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왕국은 점점 분열하기 시작하고 결국 월지, 스키타이 인들의 침입으로 약해지다가 결국 AD 10년, 마지막 그리스계 인도 왕이 폐위됨에 따라 그리스계 헬레니즘 왕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메난드로스 1세 소테르. 불교 신자로 유명하며, 그의 시대에는 이미 에우티데모스 왕가라는 혈통은 무의미해졌다.